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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바다 (2)

없다

by 아는개산책

(1편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목소리


"얘들은, 내일이 없어."


산에서 마시는 술은 취할 수가 없다며 물처럼 마셔대는 애들을 뒤로하고 조용히 빠져나온다.


낙엽이 밟힌다, 바스락-


-무서워.


두려움이라는 것은 한 번 알아채고 나면 쉬이 곱절의 곱절이 된다.


밤의 공포.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 같은, 아무도 말을 걸지 않고 어둠 속에 묻어버릴 것 같은.

칠흑 같은 밤.


발을 둘둘 털어 발끝에 매달려 있던 운동화를 떨어트리고 방으로 들어간다.


-잠이나 자자.


인기척 없는 방 안, 꿉꿉한 냄새가 나는 담요 속으로 기어들어간다.

다리를 뻗고 누우니 세상이 곧 나의 자리, 우주가 곧 나의 이불.


행복이 모양을 내면 이불과 베개가 있는 잠자리 모양 아닐까.


두려움에서 편안함으로 바뀌는 것도 순식간인 것이,

마음도 장소를 따라 옷을 바꿔 입는 게 분명하다.


눈만 감으면 돼.


쑥덕쑥덕-

소근소근-


"누가 왔어?"


대답이 없다.


쑤근쑤근-

키득키득-


꾸욱-


무언가 다리 위로 올라앉는다.


-가위야?


꺄드득-


신나 하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여자야? 남자야?"


-그게 왜 궁금해?


연애를 오래 쉬었다.


"조금만 더..."


이제 목 아래부터 팔 끝까지도 꾸욱 눌리는 기분이 든다.


-어때, 도망가고 싶어?


키득키득


"좀 더 세게 밟아줘. 온몸이 쑤시니까."


기다렸던 바다.

태어나서 한 번도 가위에 눌려본 적이 없는 나는.


한 번쯤 만나고 싶었어!

누가 누가 더 셀지.


멈칫하더니 조금 더 거친 발장난이 시작된다.


꾹꾹 꾹꾹


"잘생긴 애들은 다른 방으로 간 거야?"


-뭐라는 거야.


"옥동자... 냐고..."


-뭐어? 넌 우리가 무섭지 않아?


"사람이 무섭지. 목소리가 무섭게?"


이젠 내가 키득댄다.


-쳇, 깨어나지 못하게 해 줘도 그런 말이 나오나 보자.


"그럼 고맙지."


어차피 다...


세차게 밟아대던 발길이 조금씩 잦아든다.


보이지는 않지만, 한쪽 벽 구석에 털썩 주저앉은 것도 같고.


"벌써 끝났어? 좀 더 놀다 가."


-말 시키지 마. 힘들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나 기다린 거야? 아니면?"


사람 투 사람이 아니므로,

질문도 거를 건 없다.


-두고 온 것이 많아 못 떠난다 안 하냐. 소문도 못들은가베.


"뭐야, 유명해??"


지리산 가위.

바위. 보.

그런 게 있었나.


회사 안에서도 소문의 마지막이 나인데.

지리산 소문이야,

나한테까지 올리가 만무하지.


알아야 무서운 거라-


"사연 있나 보네."


-나를 그리워하니 못 가고, 내가 그리우니 못 간다 말이다.


"나도 보고 싶은 사람 있어. 내가 한 들어주면 내 소원도 들어주고, 그런 거 안 하나?"


넘의 사연보다 내 한풀이가 급하거든.


-붙잡지 말고 살아라, 사는 게 그래도 낫다 아이가.


말투가 계속 바뀌는 것이 한 둘이 앉은자리는 아닌 듯하다.


"죽어서도 그리워 못떠난다믄서, 말은 쉽게 하는 게 사람이긴 했나 봐."


-멋이 그리 맺힜다고. 젊은것이 이 산속까지 들어와서 허투루 망상질만 헌대.


오고 싶어 온 것이 아니래두.

가만. 내 망상이 목소리를 불러낸거야?


"나를 안고 건넌 곳이 산이었는데, 사랑도 끝나니 산은 꼴도 보기 싫어."


그랬나.

그가 미워 산도 미웠나.


'여자랑 산에 온 거 처음이야. 그런데 너여서 좋아'

'나도.'

시작도 하기 전부터 수줍었던 그 날들.


-아따메, 젊다. 푸르고만. 사랑땜시 죽네사네 하는 게.


"어차피 살고 죽는 게 다 사랑 아니여."


사람이랑 이런 대화를 할 수가 있을까.

있다면 언제가 마지막이었을까.


-산이 싫으면 바다로 가믄 되제.


"바다 간다고 뭣이 많이 다른가."


-멋이 달라야만 좋대. 수 천년 한자리에 걍 머무르는 것도 있다니.


보고 싶다.

바다.


-사는 게 끝이 없제. 끝이 없어. 막상 문 닫힌다 하면 열어달라 두드리는 것이 또 사람 맴이고.


"좀 더.. 주물러 바바."


다시 꾹꾹 대는 묵직한 느낌이 든다.


-산 같을 순 없지, 바다 같을 수도 없어, 그들이 가르치려 드는 거 봤냐. 그래도 배워지는 게 있다 안 허냐.


"몇백 년은 살아야 알려나 보지."


-그라제. 지금은 시작도 안혔지. 그래도 살겨. 사랑으로 살겨.


"지겹네"


-지겹ㅈ.. 지겨워? 지겨운겨 시방 벌써?


크크크.

진부허네 라고 안 해 다행이구만.


"과장님, 과장님."


퍼뜩 눈을 뜬다.

진한 위스키 향이 코 끝으로 전해져 온다.


"어? 은희야."


"뭐가 그렇게 재밌다고 소리 내서 웃어요, 저 들어오다 놀라서 쓰러질 뻔했잖아요. 두 명 있는 줄 알고."


"어? 어, 그랬어. 미안. 씻었어? 누워, 누워."


옆으로 몸을 틀고 베개에 얼굴을 뉘어 달빛아래 말간 은희 얼굴을 바라본다.


-그냥 살어. 다 지나가는겨.


참나.

지들이나.


정말로 잠이 든다.

이번엔 은희랑 진짜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가슴에 묻은 사랑이 산에서 시작되다는 나의 지난 얘기를.



바다


비릿한 생선 냄새가 사라지지 않는다.

분주한 칼소리, 두컹두컹 물건을 나르는 소리도 들린다.


'뭐지?'


몸을 일으키고 싶어도 말을 듣지 않는 게, 가위는 지금 눌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슬며시 한쪽눈을 뜬다.

낯선 풍경에 화들짝 일어나는 데 있어야 할 이불조차 보이지 않는다.


"뭐야? 은희야 뭐야?"


은희는 진즉 일어났는지 세수를 마친 얼굴 위에 판다팩을 붙이고 있다.


"과장님. 우리 이제 나가야 한대요. 너무 피곤해요."


"뭐야, 여긴 어딘데?"


주위를 두리번 거린다.

분주하게 아침장사 준비를 하고 있는 이곳은,


바닷가 근처에서나 볼법한 횟집인데?


"뭐야, 제일 먼저 자놓고. 제일 늦어."


강훈이 패딩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리며 멀대 같은 키 위에서 아래로 툭 내뱉는다.


"어? 어..."


뭐지, 분명 산장에서 잠들었는데.


주섬주섬 배고 있던 패딩을 펴서 팔을 끼우니 그제사 아침의 한기가 으슬하니 전해진다.


-아직도 꿈인가.


평상 아래에 구겨진 운동화를 발가락을 꾹 눌러 핀다.


"빨리 나와요, 빨리. 곧 해 뜰 시간이래요."


일출?


방구석에 널브러져 있는 휴대폰을 주워 넣고 다른 이들을 따라 종종 발걸음으로 식당을 나선다.


아직도 어둡다.


태초에는 까만 잉크부터 쏟은 게 분명해.

새로운 시작 전에는 늘 까매...


검푸르게 일렁이는 바다 중간중간 분명 하얗게 빛을 내고 있을 파도가 차례를 따지지 않고 밀려든다.


"멍하게 또 뭐 해, 이거나 들어"


강훈이 건넨 불꽃놀이 스틱에는 이미 불이 붙어있다.


파바바박-

짧은 끝임에도 열심히 빛을 낸다.


한번 더 용기 내어 묻는다.

나 아픈 사람 아니고-


"우리 지리산 안 갔어?"


패딩의 모자를 뒤집어쓰며 묻자 강훈은 어이없는 눈으로 빤히 쳐다본다.


"과장님, 정신 차려. 꿈꿨어? 바다 일출 본다고 어젯밤에 출발했잖아, 모텔도 아니고 이런 식당하나 빌려서 잠깐 눈만 감킨다고 실장한테 한마디 해준다더니."


모래사장에 흩어진 직원들의 손 안에 쉴 새 없이 터지는 불꽃들도 한 걸음 멀리에선 정말 꽃, 밤의 꽃.


여명은 밝아오는데,

해가 보일 생각은 않는 게,

오늘은 날이 아닌가 봐.라는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날아다.


해가 뜨지 않아도 바다는 빛나네.


바다


한바탕 밀어치고

산산이 부딪는 저 파도.

정말 그리움을 놓고 가라고 바다로 온 걸까.


주문한 등산화가 도착하지 않아 급한 대로 신고 나온 녹색 운동화를 내려다본다.


-바다에 놓고 가믄 되재. 그리움일랑 그렇게 보냈다가 다시 꺼내 들고, 그렇게 살면 되재.


"... 지들이나"


보았다고 본 건가

있었다고 있었나

기억한다고...

존재했나.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닌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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