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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1)

X의 헌신 (4)

by 아는개산책

양갈래로 잎이 마주 보는 긴 풀 하나를 뜯어

잎. 하나를 떼어낸다.


만난다.

안 만난다.

만난다.

안 만난다.

만난다.

.

.

.

한 장이 남았다.


방금 전에,

뭐라고 말했더라.



(X의 헌신 속 인물이 이어집니다. 김시준 재등장)



방콕


훅 들어오는 더운 열기 속에 코가 뻥 뚫리는 습기가 그득한 것이.


-왔다.


겉옷을 굳이 벗지도 않고 타국의 기온을 그대로 흡수하는 것도 나름 나를 안정시키는 루틴.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휴대폰을 꺼내 든다.


연결된 로밍으로 내릴 때부터 쉴 새 없이 울려대는 휴대폰.

환영과 경고와 준비된 다양한 메시지들이 차오른다.


살아있다는 알람 같기도 하고.


그리고 도착한 문자 하나.


+과장님, 오늘 도착하죠? 방번호 1000으로 오세요!+


박주현이다.

검정 아디다스에 삼선슬리퍼.


터키 출장 이후 몇 번의 업무전화로 급속도로 가까워진 건 꾸밀 줄 모르는 그의 성격 탓일 테다.

또는 패션.


"첫날부터?"


박주현 있는 곳에 그도 있을 거다.

김시준 차장.


-둘 만 안 있으면 돼. 여럿이 있을 때만. 그때만 봐.


회사 일을 하면서 드라마까지 만들어 낼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난 여전히.


고독한 회사원.


바로 앞에 현지인 하나가 내 차례가 되었다고 손을 흔든다.

택시에 올라타자마자 짧고 퉁명스럽게 호텔 이름을 말한다.


-나 선수니까 사기 칠 생각 마라.


휴대폰을 내려놓고 창 밖을 본다.


이래서 안 돼.

일하러 왔으면 일을 해야지.

감정놀이는 피곤해.


"안돼. 정신 차려."


중얼거리는 한국말에 택시 기사가 백미러를 올려다본다.


곧바로 표정을 숨기고 다시 창 밖을 본다.



900 호


눅눅해 보이는 이불이 깔린 침대 하나, 작은 티브이에 낮은 테이블 하나.

그리고 허연 타일바닥.

겉옷을 벗어 침대에 던져놓고 허리를 조여 오는 트레이닝 바지도 벗어서 몸을 자유롭게 한다.


"몇 시냐"


이미 9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


-일단 샤워부터. 아니 일단 박주현한테 연락? 아냐, 늦었으니까 연락 없으면 자는 줄 알겠지.


쩝 하는 입소리를 내며 쭈그려 앉아 트렁크를 양쪽으로 펼친다.

하얀 타일 끝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나 말고 누가...


으악!!!!!!!!!!!


방 안에 비치된 전화기를 찾아 1000호를 누른다.

신호는 가지만 받아 드는 이가 없다.


"오라면서. 안 기다리고 어디 간 거야 이 시간에!"


약속도 안 지키는 사람.

못 믿을 사람.

박주현!!!! 이 싸람아.


바선생의 움직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더운 나라라 그런지 빠르진 않은 것 같다.


그래도 너무 커.


-어떡해, 미쳐.


한숨을 크게 다 쉬기도 전에 결심에 이른다.


보이스톡을 누르면서도 아- 소리가 절로 나오는 지경이다.

나에게 향하는 아- 인지 바선생에게 향하는 아- 인지는 모르겠다.


"네, 김시준입니다."


"차장님! 저 고우리인데요."


"네 알고 있습니다. 도착하셨어요?"


언제 걸어도 침착한 목소리인 그라 뭘 하는 중이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럴 때도 아니고.


"아, 저 900호로 지금 와주시면 안 돼요?"


다짜고짜.


"저 지금, "


망설이지 마!


"제발요! 여기 큰일 났어요! 지금 당장요!"


주저 없이 일상톤을 꺼내 흔든다.


"하... 몇 호라고 하셨죠?"


안 씻고 있어서 다행이다.

아니, 다 벗진 않아서.


아니, 하... 그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바지를 주워 입는다.


그런데, 왜 프런트에 전화하지 않고 김차장에게 전화를 걸었지?

언제부터 바선생 때문에 죽고 살고 했었다고.


요것 봐라.



1000호


"1000호가 박주현 팀장 방이 아니고 차장님 방이었어요?"


내 방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방을 둘러보며 입구에 선 채 말을 꺼낸다.

하얗고 뽀송해 보이는 이불에 침대도 더블이다.


-제대로 부익부 빈익빈


"원래 박팀장 방인데, 바꾸자고 해서 바꿨습니다."


"네에."


"들어오세요."


시원하게 바선생을 처치해 준 그를 따라 결국 1000호로 마실을 나왔다.


"이따 박팀장도 올 거예요, 아까 잠깐 바이어 전화받고 나갔어요."


우물쭈물해봤지만, 어차피 들어갈 거 과감히 한 발을 뗀다.


테이블 위에는 잘라진 두리안이 속을 드러낸 채 놓여 있다.

나도 모르게 코를 막는다.


"냄새, 안 좋아하세요? 못 먹는 사람도 많아서."


"네, 저는 안 먹어요. 이거, 호텔도 못 가져오게 할 텐데."


"아까 박팀장이 사 온 거라. 치울게요, 잠시 앉아계세요."


테이블 위를 치우는 김차장에게서 떨어지려면.

침대 위에 앉아야 되나.


"침대에 앉아계세요. 깨끗해요 아직."


"네..."


-흐응, 여기서 자는 거야?


무슨 생각을.

요망하게.


고개를 흔들며 침대 가장자리에 엉덩이를 살짝 얹는 순간,


똑똑-


김차장과 나의 눈이 마주친다.


"차장님, 계세요? 저 우병현이에요."


시에서도 나온다더니, 간담회 때 보았던 주무관의 목소리다.


'어떡해, 어떡해'


얼굴을 감싸 쥐고 소리 나지 않게 입모양으로 김차장을 불러본다.

그는 문과 나를 번갈아가며 쳐다보다가 이내 문쪽으로 걸어간다.


-하, 괜히 이상한 오해 사겠어.


나는.


이불을 펄럭 들어 구겨진 것처럼 보이도록 공간을 만들어 속으로 기어들어간다.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최대한 쭈글어든다.


문이 열린다.


-개망



(2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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