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의 헌신 (4)
If (1) 편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살얼음
정녕 이곳이 덥고 습한 동남아의 중심 태국이 맞던가.
-살 떨려.
잠시 들른 줄 알았던 우 주무관은 어느새 자리를 잡고 총각들의 술파티 같은 소리를 하고 앉아있다.
"네, 주무관 님."
영혼 일도 없이 '네'만 반복하는 것도 못 알아듣는 것이, 이미 몇 잔 하고 오셨는데요.
-엇, 누가 왔다.
노크소리 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고과장님 왔어? 어? 아아~ 주무관님도 계셨네요."
박주현 팀장의 잔뜩 들떠있는 목소리가 들린다.
반갑다 친구야. 나 좀 살려줘.
-둘은 어떤 눈빛을 주고받을까. 나 여기 있다고 해봤어?
슬리퍼로 바닥을 질질 끄는 소리가 침대 쪽으로 가까워진다.
-헉, 벌써 알아들었다기엔 너무 짧은데? 모르고 앉으면 놀랄 거야. 제발, 정지.
이불속에서 작아진 내 몸이 더욱 오그라든다.
털썩.
앉는 자리가 내 머리를 간신히 비켜갔다.
"박팀장님, 어휴 언제 봐도 훤칠한 게. 허허허, 잘 생겼어. 여기서 같이 한 잔 해요."
눈치라곤 일도 없는 남자 셋이 모여있다.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 하하, 그냥 여기 차장님, 뭐 좀 전해줄 게 있어서."
-그니까, 나가라들 제발.
퍽.
'우욱'
급하게 손으로 입을 가린다.
뒤로 기대려고 뻗은 손이 내 등을 정확히 가격했다.
동시에 김차장의 목소리가 다급해진다.
"주현, 아니 박팀장님. 주무관님, 저 이제 물 사 오려고 하는데요, 같이 나가실까요?"
한국말 아시죠?
"아 왜에, 지금 한창 좋은데. 내일부터 바빠져서 시간도."
"내일 업체간담회도 있고, 오전에 다들 일찍 나오실 거라. 저녁에 소주도 많다고 합니다."
-뭔 소리
김차장이 평소 답지 않게 횡설수설이다.
그래도 눈치를 채긴 한 건지 박팀장도 분명 놀랐을 텐데도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곤란하게 해서 죄송해요.
울고만 싶다.
기다렸어요
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지만,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조금 더 기다린다.
하얀 이불사이 그 살짝 벌어진 틈에도 빛이 들어온다.
멍-
터키에서.
오른손을 활짝 펼쳐 보였다.
다가오던 김차장의 얼굴 정면에.
반사적인 행동이었지만.
당황하던 그의 표정.
-벌 받는 건가.
만일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의 행동이 나의 예측범위 안에 있는 거라면.
나는.
항상 한 발 느린 사람.
If 로만 되돌려 보는 사람.
"뭐 하십니까"
이불이 젖혀진다.
깜박깜박.
"몇 시예요?"
"세시 넘어가는데요."
아기냐.
머리만 닿으면 자게.
"아, 박팀장님은... 아니, 세시요? 왜요?"
"네?"
그가 안경을 벗어 입고 있는 티셔츠로 슥슥 닦는다.
"밖에서 맥주 한잔씩 했어요. 가신 줄 알았는데."
"저도. 제가 간 줄 알았는데."
깜박깜박.
검정뿔테 너머에 속을 알 수 없는 그 눈빛.
"기다렸어요?"
어떻게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무표정한 얼굴로.
또.
다가오는 거 아니야?
이번엔... 사라지는...
어디선가 코 고는 소리가.
응?
눈을 번쩍 뜬다.
-아씨, 또 꿈?
이불을 젖히고 바로 앉아서 방안을 살핀다.
괜히 입고 있는 옷도 한번 살피고.
침대 옆 소파에 김차장이 가지런히도 누워있다.
"안경을 끼고 자네"
쌔근거리는 숨소리가 침대 위까지 전해진다.
-연애를 너무 쉬었나.
잘 꾸지도 않던 꿈에, 뭔 안락한 호사라고 남의 방에서 코까지 골고 자노..
'죽어라 죽어'
깨지 않게 최대한 살금살금 빠져나와 조용히 문을 닫는다.
딱-
어? 불 끄는 소리?
잘못 들었나.
병
오일 내내 장염 증상이 있더니, 급기야 열이 오르기 시작한다.
-비행기 못 탈 수도 있어, 최대한 안 아픈 척해야 해.
충혈된 눈에 힘을 준다.
자리를 찾아 앉자마자 주머니를 뒤져 접어놓은 쪽지 한 장을 꺼내든다.
전시를 마친 업체들은 어젯밤 모두 같은 비행기로 귀국길에 올랐다.
밤 시간대 비행기라 짐을 맡길 데가 없다는 박팀장의 말에 내 방에 캐리어를 두어도 좋다고 한 것은 김차장의 것까지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그런 건 찰떡같이 알아들었어.
오후에 아무도 없는 방에 들러 그 둘의 캐리어 위에 초코파이 하나씩을 놓았더니,
일을 마치고 돌아온 밤에는 이미 캐리어는 사라지고 그 자리엔 쪽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한국 도착하는 날, 괜찮으시면 저녁 같이 하시죠. 연락드리겠습니다. 주신 정情 감사히 받겠습니다. -김시준.+
情...
정이라...
정말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어요?
코 끝으로 뜨거운 김이 새어 나온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집에 들어왔지만 열감이 떨어지기는커녕 이젠 온몸이 욕조에서 건져낸 수건처럼 묵직하기만 하다.
-짐, 내일 풀어, 내일.
급한 대로 약통을 뒤져보아도 대일밴드 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이거라도 이마에 붙일까
"하... 아픈데. 안 좋은데..."
나는 그렇게 대일밴드를 쥔 채로 침대에 눕는다.
집채만 한 손이 단숨에 올라와 허리를 움켜쥐고 침대 아래 깊숙한 곳으로 빠르게 하강한다.
-롤러코스터... 나가야 되는데...
깊고 깊은 단잠에 빠져든다.
돈워리 비해피
눈꺼풀이 무겁게 짓누르지만 한번 더 힘을 주어 눈을 뜬다.
어둡다.
-불도 안 키고 잤네...
시계를 보기 위해 더듬더듬 휴대폰을 찾아든다.
부재중 전화 (3)
문자 (1)
쿵-
-놓쳤나.
통화목록을 열기도 전에 문자가 보인다.
+앞으로 사적인 연락 자제하겠습니다.+
"아..."
만나기로 했었다.
오피스텔 위치를 문자로 보냈던 것도 같고.
그간의 일들이 꿈인 듯 아득하다.
-할 만큼. 했다는 건가...
흘러간다.
지나갔다.
문 밖으로 희미한 소리가 들려온다.
'돈워리~ 비해피~'
'돈워리~ 비해피~'
아, 또 시작이다.
며칠 전에도 경비실에서 안내방송이 흘러나왔었다.
'아, 아. 고양이를 잃어버리신 분이 있어, 보신 분이 있으시면 연락부탁드립니다. 고양이는 두 마리고요. 이름은 돈워..크흠. 하... 아 죄송합니다. 돈워리 그리고 비해피라고 합니다. 아익크, 죄송합니다. 갈색털에 검정 줄무니가 특징이라고 합니다. 복도에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보신 분들은 경비실로 연락부탁드리겠습니다.'
'돈워리(걱정 마)~ 비해피(잘될 거야)~'
노는 건지. 찾는 건지.
하...
저 소릴 들을 때마다 웃음이 났었는데.
오늘은.
불을 켜지 않아도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방의 윤곽이 드러난다.
그래도.
아직
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