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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해 정말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나란 사람

by 아는개산책

"안 힘들어요?"


"힘들어."


"그런데 몇 년 째에요 벌써."


"몇 년이지?"


"우리 회사가 그렇게 좋아요?"


"최악이야. 그런 걸 물어"


"그런데 왜 해요"


"그냥"


"옮길 거죠? 오라는데 많죠?"


"뒤통수 쳐가면서 까지 할 일인가."


거짓말 조금 보태 백번은 들었을 질문.


그냥.

일해.


그뿐인데.



L.A


공항을 둘러 나오는 길에 LAX라고 쓰여 있는 커다란 문구가 눈에 띈다.


-하늘 참 파래.


천사들이 살아서 그런가.


'방콕 갔다 온 지 얼마 됐다고 또 가?'


퇴근 후 유일하게 매일 보다시피 하는 사이.

유리가 일주일을 또 기다려야 하는 게 못내 아쉽다는 듯 말했다.


'인생 뭐 있냐'


출장이라도 다녀오면 출장비로 잔고를 조금 더 채울 수 있다.


유일한 낙이지 뭐.


'LA 날씨 엄청 좋은데, 같이 가. 휴가 내고.'


'잘 다녀와~'


둘 이상 다니는 출장도 잦아지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혼자 가는 출장에 외로움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알바라도 있으면 나은데.


알바?


문득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유학생 재혁이 떠오른다.

이미 전시 아르바이트 인연으로 10년이 넘었다.


+잘 지내? 나 미쿡+


바로 휴대폰이 울린다.


"누나 미국 오셨어요? 저 베가스 있다가 지금 올랜도! 누난 어디예요?"


해외에서의 만남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그때 그 순간에 머물러 있다.

우리의 공기가.


"나, LA"


"아~ 거기도 전시 있구나. 심심하시겠어요"


"심심해해야지"


"올랜도 올래요? 저도 혼잔데. 어차피 전시 시작하면 쉬시잖아요"


"응? 흐흐, 그렇다고 너랑 밥 먹자고 비행기 타까"


실없이 웃어대던 그의 은밀한 목소리가 통신을 탄다.


"과장님 여기. 카지노 있어요."


택시에서 일어설 뻔.


인생 뭐 있나.


나중은 없을 수도 있어.



올랜도


"크크 오실 줄 알았어요."


공항에 마중 나온 재혁이 차 문을 열며 말한다.


-나는 몰랐는데.


"너무 싸서, 어쩔 수 없었어."


항공료가 생각보다 저렴했다.


"크크크, 언제 다시 가세요?"


"내일 가야지, 하루 바짝 하고."


차가 달린다, 야자수들이 손을 맞잡고 기다리는 사이로.

이미 머문 적 있는 반짝이는 시내와는 사뭇 다른 바람들이 지나간다.


"제대로 알고 가는 거지? 나 묻으러 가는 길 아니지?"


"하하하, 과장님은 제가 아는 모든 사람 중에 가장 "


"예쁘지."


"특이하세요. 하하하."


조수석에서 운동화를 벗고 아빠다리를 해본다.

조금 더 자유롭다.


자유롭게 베가스를 누렸었다.

휴직을 했던 6개월. 재혁과 급속도로 친해졌던 시간이기도 하다.

카지노에서 매일 마주치다 보니.


"배고푸다."


"진짜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 정열적? 아니 그게 아니라. 편견이 없다?"


"분석하지 마. 먹을 거 없어?"


"아, 뒤에 샌드위치 있어요, 가는 길에 사 먹을 데가 없을 거라."


진즉 해야 할 말을 나중에 하네.

뒷자리로 고개를 돌려 널브러져 있는 재킷 아래 비닐봉지를 들어 앞으로 가지고 온다.


"카드 하고 싶어서 어떻게 참았어요? 크크 강원도 가세요?"


"언제가, 거까지"


"바쁘시죠."


"필리핀 가."


운전하는 사람이 앞은 안 보고 옆을 보며 빵 터진다.


"네? 역시... 크하하"


차가 달린다.

창 밖으로 보이는 건물이 줄더니 점점 차들마저 뜸해진다.


-문자 보내야 되나.


연락 없으면 국제경찰에 신고하라는 문자를 유리에게 보내야 할지.


또 고민만 하고 있다.



크루즈


"대박. 대박. 대바아아악."


열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이 나이 먹도록 크루즈는.

가까이서 보는 것도 처음이야.


"표는 샀는데, 아직 기다려야 돼요. 출발하려면."


"와. 이 뭔데 뭔데."


신이 나서 재혁의 팔뚝을 팡팡 친다.


"여기서 이거 타고 삼십 분 가면, 거기서부터 게임 합법구간에 들어가거든요. 거기서 세 시간 게임하고 다시 돌아와요."


"우와아. 넌 왜 알아."


"크크 알려고 하면 알죠. 누나 우리 어디서 만난 지 알죠?"


우리나라 학생들은 참 똑똑하다.

미래가 밝아.


신나는 일이 시작되기 전의 설렘은 시간이 지날수록 부풀어 오르는 솜사탕.

말로 풀지 못한 화가 시간이 지날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과.

비슷한 것도 같고.


크루즈에 오른다.



선상


게임을 하는 객실이 생각보다 넓진 않다.

테이블로 가득 차있어서 그런가.


슬럿 몇 개의 윙윙 거리는 소리가 돌아가고 카드 테이블마다 정복을 입은 딜러들이 하나 둘 자리를 잡는다. 인기 있는 블랙잭 테이블 옆으로 바카라 게임을 할 수 있는 테이블은 단 두 개.


그마저도 미니 느낌이지만.


"좀 작죠?"


"넓다고 따나."


어차피 딜러와의 한판.


하지만, 게임이 풀리지 않을 땐 테이블을 옮기는 것도 방법인데.

단 두 개뿐인 게 아쉽다.


배는 이미 출발했지만, 어느 경계에 들어서기까지는 게임이 시작되지 않는다.


"저, 다른데도 좀 둘러보고 올게요. 어차피 한 삼십 분 기다려야 돼."


나는 두리번대다가 바카라 테이블에 서서 먼 곳을 보는 딜러 앞에 앉는다.


"안녕"

"안녕"

"머리스타일 멋지다."

"고마워, 너도 조끼 예쁘다"


말을 마치고 미소 띤 얼굴로 눈이 마주쳤지만, 이내 다시 먼 곳으로 시선이 돌아간다.


좀 친해져 봐야지 했는데, 오히려 단단한 성벽의 방어진이 쳐진다.


-왠지, 따서 가긴 힘들 것 같네.


테이블에서 휴대폰만 보고 있는 중에 방송이 나온다.


딜러가 테이블 아래에서 칩을 꺼내 올려놓는다.


녹색칩. 미니멈 25불.


게임을 시작한다.


한 시간 후, 미소가 사라진 나와 재혁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선상으로 올라간다.


아휴, 아휴.

벽마다 한숨만 잔뜩 묻혀 놔야지.


선상에는 작은 바가 열려 있고, 진열된 술들이 아슬아슬하게 손짓한다.


실패해도 지금이 끝이 아니야, 여기서 한 잔 더해봐~

바닷바람이 말을 건다.


"맥주 한잔 하실래요?"


"돈 있어?"


"맥주 두 잔 살 돈은 있어요."


"집에는 어떻게 가"


"카드"


칠흑 같은 어둠 속 바다 한가운데, 하얀 크루즈 위에는 재혁과 나 둘 뿐이다.

아니 너무 어두워서 다른 쪽 사람들이 잘 보이지가 않는다.


"바다 위에 있는 건지, 하늘 먹구름 위에 있는 건지"


"이 시간에 바다 위에서 이러고 있을 줄은."


"나는 LA 왔다가 올랜도 배 위에서 맥주 마시고 있을 줄은."


우리의 초라한 대화에 동시에 웃음이 터진다.


웃어야지 뭐.

돈 없다고 울어?


"과장님은 언제까지 할 거예요 이 일?"


"보통 정하고 하나? 난 모르겠는데."


"힘들지 않아요?"


"솔직히 난 아무 생각 없거든? 그런데 누가 이렇게 물어보면, 아 힘든 일을 하고 있나? 그때 생각하는 거 같아. 그런데. 별로. 재밌어 그냥."


"과장님은 충분히 즐기는 것 같아요. 일만 즐기는 게 아니라 그렇지. 크크, LA 일은 잘 됐어요?"


"으아, 내일 가서 해야지 또. 빡시게."


"크크, 어쨌든 계속 보겠네요"


"복수혈전 하러 와야지."


"아아 노노, 그땐 혼자 오세요. 크크 엄청 잃었다고요, 저는."


말을 내뱉을 때마다 작은 파도가 우리들의 말을 한마디씩 집어삼킨다.


흩어져서 남지 않는 말들.

흘러가서 남지 않은 감정들.


그냥 하면 되지.

복잡하게 생각 말고.

억지로 붙들지도 말고.


좋아하나 봐

정말.


나의 일.



(끝)


'네, 정말 좋아합니다.'

연재 하나가 끝이 났습니다.

그동안 부족한 문장과 내용에도 응원과 따뜻한 시선을 보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시상식 온 줄?)


아무것도 아닌 날, 아무 일도 없을 때 다시 불쑥 찾아오겠습니다.

지금까지는 과장, 차장을 넘나드는 이야기였고, 다음 편은 차장, 부장 쪽이지 싶습니다.

직급은 쓰기 쉽게 통일해 버렸습니다 ;; (직급 올라도 변하는 것도 없고;;;)


귀한 시간 내어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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