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싶은 것
때로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아니 그보다 더,
낭떠러지 끝에 서 있는 듯한 막막함.
나는 가진 것이 많지 않다.
딱히 기댈 수 있는 곳도 없다.
결국 기본으로 들어간다.
할 수 있는 게 없어 마음을 꺼내든다.
진심을 다하면.
닿을 수 있는 곳.
우리가 하는 일.
사람이 하는 일.
식사 초대
오늘로써 전시 마지막 날이다.
-후아, 어떻게 끝은 났어.
참가업체별로 찾아가 담당자들에게 인사를 전하다가 마지막 가장 큰 부스 앞에서 잠시 머뭇거린다.
-사장이다.
그의 포스에 나의 시선이 절로 떨어진다.
L 사의 사장은 옆자리에 앉은 박이사를 툭툭 치더니 대화를 나눈다.
다시 눈을 들어 목례를 간단히 하고 옆 부스로 옮겨가려는데, 박이사가 나와서 작은 소리로 이름을 부른다.
"우리씨, 아 고과장님"
"네, 이사님"
못 들은 척 하기엔 너무 가깝다.
"오늘 저녁에 사장님이 식사 한번 같이 하자는데. 시간 되세요?"
이사라는 직함과는 어울리지 않게 함께 동네 마실이라도 나온 듯 언제나 편하게 나를 대한다.
"사장님이요?"
"장소는 이따 문자로 찍어드릴게요. 응?"
소녀 같은 목소리의 박이사는 나보다 열 살이나 많다면서도 만나면 늘 먼저 팔짱을 꼈다.
육아로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일 년을 기다렸다가 다시 출근하라고 먼저 제안했다는 사장.
-일은. 무섭게 잘하니까.
그런 신뢰를 가진 박이사를 주축으로 급속도로 성장하더니 어느새 업계에서 제대로 자리 잡고 있는 회사 L 사.
그 회사의 사장과 나는,
고소인과 피고소인으로 마주 앉을 상황까지 치달았었다.
불과 며칠 전 만해도.
사고
"벌써 끝?"
책상 위 다이어리와 문구들을 정리하는 나를 보며 김과장이 묻는다.
"어, 퇴근 시간."
"퇴근 아직 한 시간 남았거든."
"그니까 퇴근 시간."
나는 웃으며 김과장에게 대꾸한다.
"너 그러다 진짜 사고 한번 크게 터진다."
"사고 나면 너한테 인수인계하고 그만둘께."
김과장이 눈을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사고는 나는 사람한테나 나지.
책상 위를 깨끗이 치우고 마지막으로 메일함을 열어 오전에 속독했던 부분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메일 확인 다음으로는 탁상달력 속 메모를 훑는다.
어라?
오늘 날짜에 분명 '도착'이라는 빨간 글씨가 보인다.
+L 사꺼, 미국 간 거 어떻게 됐어? 도착했지?+
잠시 후 독일 파트너로부터 회신이 온다.
+세관시스템이 마비였어. 아직 독일에 있어.+
급하게 달력을 들어 날짜를 센다.
-오십일 밖에 안 남았는데?
독일에서 미국은 배로 한 달.
하지만 천재지변 등의 예상 못한 지연까지 감안하면 두 달까지도 봐야 한다.
전시는 앞으로 오십일 뒤.
잘하면 본전.
잘못하면.
대형사고다.
어떻게
"아직 두 달 남았잖아. 아이, 괜찮아."
머리를 쥐어뜯다가 급기야 책상에 처박아 버리는 나를 보며 김 과장이 말한다.
사고가 터지면 그땐 좀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나의 일은 결국 나의 것이라는 것을.
"실망하실 거야."
L 사를 영업하기 위해 몇 년 동안 민망함을 무릅쓰고 부르지도 않는 회사를 몇 번씩이나 찾아갔던 것을 떠올린다.
이제 겨우 3년... 아직 다 보여드리지도 못했는데.
성실은. 장기 전으로 증명된다.
"그러니까 그냥 기다려. 말하지 말고. 한달 반이면 충분히 들어가."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해결은 기본이다.
해결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방식.
그리고 그 방식의 시작.
신뢰와 돈을 잃을 각오를 하고 아직 시간이 있는 지금이라도 이실직고하여 대비를 시키느냐.
잘 해결될 거라는 데 올인을 하여 신뢰와 돈을 지키며 시간을 버느냐.
하지만 진짜 날짜를 못 맞추는 일이 발생하게 되면.
그다음은?
해결이 안 될 수도 있다는 전제의 결론은 어차피 하나다.
나락.
난. 어떤 담당자가 되고 싶은 걸까.
(2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