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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진 않지만

드라마가 보고 싶다면.

by 아는개산책

예쁜 사람. 잘생긴 사람. 선한 인상. 악한 인상.


어떤 사람이 좋아?


눈으로 규정한다는 인간의 분류는

얼마나 정확할까.


인상을 묻는 질문에 나의 대답은 늘 같다.


가죽 벗기면 그 안은 다 똑같아.


믿는 사람. 믿지 않는 사람.

따르는 사람. 따르지 않는 사람.

하는 사람. 하지 않는 사람.


정말 알아야 건 오히려 이런 거 아닐까.


함께 했을 때 어떤 드라마가 만들어질지 말이야.



새 친구


"자카르타는 가 본 적 있고?"


비행기 좌석에 몸을 깊숙이 묻으며 묻는다.


"아니요, 과장님은요?"


"나? 한 번인가."


"동남아가 다 똑같겠죠."


"그르치 뭐."


짧은 대화를 끝으로 우태는 이어폰을 꽂고 나는 눈을 감는다.


7시간이면 금방이지.

팔뚝길이만 한 작은 창문 밖으로 구름이 가득하다.

어릴 때는 늘 궁금해하던, 그 구름 위 하늘.


육 개월 전, 우태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경쟁사라면 경쟁사인 N 사에 다니는 김우태 대리.


"과장님, 술 한잔만 사주세요."


영양가 없는 안부를 주고받다, 대리가 됐니 과장이 됐니 하다가 나온 말이었다.


"술? 그려, 안주는 내 맘대로. 금요일에 봐."


퇴근 후 술상이 곱게 차려진 곱창집에서 그는 동그란 뿔테 안경 속의 눈두덩이를 연신 비벼대며 회사생활이 힘들다는 말만 반복한다.


"N 사가 좀 체계적이지. 그래서 그래?"


곱창이 삼분의 일 정도만 남은 것을 보니 이제 본론에 들어가도 될 것 같다.


"네, 체계고 뭐고. 하. 시시콜콜 대표가 다 신경 쓰고. 그런데 그런 것보다 말이 진짜 많아요."


소주 한 잔을 꺾으며 그의 말을 기다린다.


"그 쬐매 난 회사에도 라인이 있어서. 정치질 장난 아니에요. 나랑은 안 맞아."

"사장이 둘이라..."


곱창이 꼬숩다.


"네. 저 같은 애는 못 따라가겠더라고요. 대리밖에 안 됐는데도."


지글지글 튀던 곱창이 노릇노릇하다가 점점 거뭇해진다.


"과장님네는 분위기 좋죠? 전시팀 직원들은 나이가 다 젊잖아요."


"분위기? 그런가."


우태는 소주잔을 만지작거리기만 하고 얼마 남지 않은 곱창은 익어만 가고.


나는 집에 가고 싶고.


"경력자 이직이 회사도 당사자도 쉽진 않을 텐데. 알지?"


"네, 알죠. 저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잘할 수 있어요. 과장님."


얼마 후 그는 내가 속한 팀으로 이직을 하였고 그가 맡은 첫 전시회의 출장에 내가 따라가게 되었다.


팀장에 의하면,


"네가 자카르타 많이 해봤으니까, 네가 가."


"네."



저만 믿으세요.


우태는 똘똘이 스머프처럼 보이는 안경만 끼고 있는 게 아니었다.

무엇이든 알아서 척척척.

말하지 않아도 택시를 부를 줄 안다는 게. 역시 경력자인 것인 것인가.


"과장님, 잠시만 여기서."


유리문 너머에 이미 땅거미가 진 자카르타를 무심히 쳐다보고 있는데 기사 하나가 가까이 다가온다.


Mr. U TAE KIM

팻말을 들고.


"우어얼"


먼저 감탄을 쏴준다.

그의 어깨가 으쓱하더니 안경태도 한번 쓰윽 올린다.


"이 정도야 뭐. 저 말레이시아에서 잠깐 살았었다니까요."


"진짜? 나 몰랐는데."


"그래요? 하하 누구한테 말했지. 저 거기서 장사도 했었어요."


기사를 따라 택시에 옮겨 탄다.


"너 나이가 몇이야?"


타국에서 장사면 인정이지.


"나이요? 과장님보다 한참 어리죠."


그렇게 받을 줄은.


"그러고 보니 말레이시아 사람이라고 해도 믿겠다."


그러니 나도.


호텔로 가는 차 안에서 우태는 이렇게 말이 많았었나 싶도록 말레이시아에서의 청춘을 읊는다.


"멋지다."

"대단해."


추임새만 놓치지 않으면 재밌는 이야기를 끝까지 들을 수 있다.


체크인을 마치자, 우태가 미련 없이 인사를 한다.


"푹 쉬시고 내일 봬요, 과장님. 아 과장님 내일 끝나면 뭐 하실 거 있으세요?"


"없는데."


"그럼, 제가 좋은 데 알아볼게요. 맛있는 거 사주세요."


사주세요가 앞에 나왔으면 일정이 있었을 텐데.


"그러자"


"저만 믿으세요."


트렁크를 두 손으로 끌며 뒤돌아 말하는 그는 똘똘이 스머프.

눈웃음을 잘도 짓는 그 뿔테 안경 속 두 눈.


난 아무도 믿지 않지만 너는 재미는 있겠다.


"나중에 사기당해서 돈만 다 날리고. 고생만 진탕 하다 한국 왔잖아요."


택시 안에서의 그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도는 건.

기분 탓이다.


피곤해서 그래.



SO HOT BAR


문을 열고 들어가자,

너무나 어둡다.


"음식이나 보이겠나."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우태는 옆에서 뭐가 좋은 지 아까부터 싱글벙글이다.


"여기 엄청 핫 하데요, 파트너가 알려줬어요."


그러면서도 중앙 테이블에 앉을 용기는 없는지 구석자리를 찾아 나를 이끈다.


"밥 될 만한 게 있을까?"


배가 고픈데.

여긴 완전 BAR 다.


낮은 테이블을 가운데 놓고 둥글게 둘러있는 소파 위에 마주 볼 수 있게 일단 앉는다.

무대처럼 구성된 곳이 정면으로 나에게만 바로 보여 나란히 앉을 걸 그랬나 싶다.


-직접 노래 연주도 하나 보네.


어느 결에 조금은. 아니 많이 가리지 않은 여직원이 와서 메뉴를 건네며 우태를 보고 싱긋 웃는다.


"너 여기 사람인 줄 아나 봐."


"설마요 과장님. 그냥 여기서 먹히는 얼굴? 하하"


은은하게 깔리는 음악은 가사가 없지만 저녁 시간대의 나른함과 잘 어울린다.


"어때, 회사 옮기니까. 좀 할 만 해?"


테이블 위에 미리 올려져져 있는 스틱 하나를 집어 든다.


"똑같죠 뭐. 그래도 거기처럼 사람 쪼는 건 없는 것 같아요. 아니, 더... 아예 서로 관심이 없는 느낌?"


우태는 말하며 본인이 먼저 웃음을 터트린다.

웃는 그의 눈을 보려 고개를 들었을 때.


우태의 등 뒤로 쇼가 시작하는 느낌이 든다.



레알?


겉옷을 왜 벗나 했는데.

금세 속옷만 남는다.


"뒤돌지 마."


어두워서 허리를 바짝 숙여 메뉴판을 보고 있는 우태에게 얼음을 외친다.


"네?"


"업체 있어."


일단은.


"헉. 그런데 업체 있으면 안 돼요?"


"그냥. 우리. 나가자."


"네에? 뭐 어때요?"


고개 들지 마!


하지만 우태에게 결정권이 있는 게 아니었다.


한 아가씨가 무리에서 빠져나와 듬성한 테이블 사이로 우아하게 걸으며 우태에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마지막 남은 속옷에 손 하나를 걸친 채.

툭...


누구의 잘못인가.

아니 이건 잘못인가.


아니 우선.

실화인가.


우태는 인기척을 느끼고 옆을 돌아보다가 마시던 물 잔을 그대로 떨어뜨린다.


까깡-


"나가자, 나가자."


분명 어두워서 글자도 잘 안 보였는데,

사람 몸은 왜 이렇게 잘 보이냐.


쏟아진 물을 휴지가 잡히는 대로 대충 닦아내고는 얼굴도 못 들고뛰다시피 빠져나왔다.


벌렁거리는 심장은 그 자리에 남겨두고.


"으하하하하하하하하"


미친 웃음이 먼저 나온다.

살았다는 느낌이 이런 건지.


"과장님. 하하하. 아. 과자... 하.. 죄송해요.. "


우태는 눈물을 닦는 건지, 날 볼 수가 없는 건지 안경을 벗어 눈가를 훔친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도로로 나가 택시를 잡는다.


택시 안도.

어두워서 다행이다.


안 먹힌 것도.

다행이고.



사람과 있으면


그날의 출장을 마치고 십 년이 넘게 흐르도록.

우린 누구에게도, 서로에게도 그 밤을 꺼내지 않았었다.


그러던 어느 오후 함께 외근을 나가던 날.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은 익숙한 음악이 우태의 차에서 흘러나왔고,

문득 나는 그에게 물었다.


"우태야, 가끔 아주 오래된 일들은 진짜였는지 왜곡인지 헷갈릴 때가 있어."


"맞아요, 저도 가끔 그럴 때 있어요"


"너랑 나랑 자카르타 출장 같이 갔었어?"


"네, 한 번 갔을 걸요?"


"그때 혹시 우리, 바에 갔었나?"


"부장님이 무슨 바를 말씀 하시는 진 모르겠지만, 저는 아무것도 못 본 것 같아요."


"아. 꿈이 아니었구나."


"진짜였어요."


"맙소사"


이제야 그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낸다.


사람을 따라가면.

드라마가 생긴다.


장르는.

작가가 정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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