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 배틀

장난치다

by 아는개산책

행복이 아니면 불행일까?


아니,

행복도 불행도 포장지일 뿐.


내가 행복으로 포장하면 행복이고,

불행으로 포장하면 불행이고.


포장하지 않는 그것은.


것이


진짜

삶.



마사지기


오후의 회의가 끝났지만 자리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고 막간의 수다가 이어진다.


"저 몇 킬로 빠졌게요"


"엄청 많이 빠진 것 같아. 반쪽 된 거 아냐?"


나는 그냥 하는 말 같은 건 하지 않는다.

그녀는 수술을 하더니 정말 반쪽이 되어있었다.


"30킬로."


우와. 우와 하는 소리가 터질 수밖에 없다.


"완전 혜나 과장 몸에서 고차장님 나왔네."


"고차장님 30이에요?"


어이없어 웃는 사이 회의실 문이 열리며 이실장이 들어온다.


"자. 이거 무슨 발마사지기 인가 한다는데, 필요한 사람 가져가. 하나밖에 없어서."


회의실의 노닥거리던 직원들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박스에 꽂힌다.


"와, 이거 내 거."


태수가 가장 먼저 찜을 외쳐보지만, 이 안에는 이미 5명의 인원이 눈을 번뜩이고 있다.


"야, 야. 가위바위보 라도 해."


김차장이 중재하는 목소리 뒤로 나 역시 뭘 내서 저걸 겟 하지 싶다.


머릿속에 돌려보는 시뮬레이션 가위 바위 보.


"아, 무슨 가위바위보예요. 그럼 그냥. 이 중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가져가는 거 어때요. 응? 고차장님, 좋지?"


태수는 늘 본인이 제일 불쌍하고 불행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렇게라도 관심받고 싶은 어린아이처럼.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산 사람. 가져가."


태수가 박스에 손을 얹으며 선전포고 하듯 큰소리로 말한다.

하지만 물러날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는다.


우린, 불행 배틀에 조금 더 익숙하다.



불행 배틀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엔 오래된 사이건 그렇지 않은 사이건, 소수의 만남과 다수의 만남은 그 대화의 결이 다르다.


소수일 때 조금은 진솔해질 수 있는 마음은, 다수일 땐 감춰지기 마련인.


누가 누가 얼마나 행복한지 숨은 경쟁 하듯, 문장을 끝까지 다 듣고 나면 어느새 힘들다는 이야기가 그래서 행복해로 바뀌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 회사는 다르다.


마치 누가 돈이라도 빌려달라고 할 것처럼, 애정을 갈구하듯이. 내가 얼마나 힘들고 어렵게 사는 지를 필터 없이 떠든다.


진실이고 가식이고는 중요하지 않다.

그런 걸 따져 뭐 하나.


"저 이번에 수술해서... 돈 천만 원 깨지고. 진짜 마취 안 깨서 죽을 뻔했어요."


혜나가 겁도 없이 포문을 연다.

나는 턱을 괴고 이들의 입과 표정을 본다. 물론 내 불행도 열심히 찾아가면서.


"아씨, 그건 너 예뻐지려고 한 거잖아. 몇 천만 원이나 들여서. 나도 코 하고 싶은데 지금 돈 없어서 못하는 데에!"


역시 태수가 바로 수비를 한다.


말 잘하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울 김차장은 왜인지 손만 만지작 거리며 애들을 흥미롭게 보기만 한다.

입은 조금 벌어진 진채로.


"저, 반지하 살아요. 빛도 잘 안 들어와요."


"나도 월세 단칸방이거든. 넌 몇 평인데?"


가난을 끌고 온다.

재밌다.

내가 니들 월급을 다 안다.


"젊었을 땐 다 월세 살고 하는 거지. 난 너 만할 때 친구 집에서 얹혀살았다."


김차장이 정리해 버린다.


"나도 이십 대 때 방 6평짜리에 부엌 화장실 다 들어있는 데서 8년 살았어."


나도 한마디 보태본다.

딱히 불쌍한 일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기에 공감할 순 없다.


패스다.


"민상이는, 뭐 있어?"


평소 과묵한 편인 민상이도 마사지기는 욕심이 나는지 말은 안 해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저는 저번달에 아버지가 쓰러지셔서. 대전 다녀왔어요."


부모가 들어온다.

그건 좀 위험해.


"나는 고등학교 때 아버지 돌아가셨는데."


규현이 잔잔한 목소리로 배틀에 참전했음을 알린다.


-허크. 이걸 누가 이겨.


"아니, 부모는 그렇지. 자기 자신을 얘기해야지. 현재를."


혜나도 지지 않는다.

미용이 아닌 건강상의 이유로 수술을 한 혜나도 억울한 부분이 많다.


"아 나는 부모님 따로 떨어져 사시고, 어릴 때 삼촌 손에서 컸어어. 것두 필리핀에서. 진짜 안 해본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다 했다. 한국 와서도 뭐 편한가 아직도 어? 백수 동생 뒷바라지 한다고. 어? 걔는 미친 x이 맨날 쳐 놀면서 설거지도 안 하고 밤에 나가서 아침 다 돼서 들어오고. 내가 제일 불쌍한 사람이라고요."


호소하듯 쉬지도 않고 말하는 태수의 스토리는 이미 여러 번 들은 이야기.

슬픈 건가. 하지만 모두 웃음이 터진다.


미화하지 않는 날 것 그 자체인 그의 삶.


"그래, 넌 고생한 게 얼굴에 보여."


"아 왜에. 내 얼굴이 어때서. 네? 차장님. 정말 이러기야? 응?"


맞장구쳤다가 더 흥분시키는 것도 레퍼토리다.

난 그가 이렇게 힘든 것을 힘들다 하지 않고 농담처럼 신나서 떠드는 얘기에 불 붙이는 것을 즐긴다.


"차장님은 지인짜 고생 안 해봤지. 집 있어, 차 있어. 아쉬울 게 뭐 있어. 아, 남자가 없나?"


꿈틀.


"나 보이스피싱 당하고, 코인사기도 당하고. 합치면 삼천만 원 정도 될걸? 그리고 부모님도 안 계시잖아."


짐짓 정색하며 조용히, 하지만 부드럽게 말을 꺼낸다.


-이대로 넘어가라.


어차피 회사 내에 진짜 내 얘기를 아는 사람은 없다.

그 모든 시간을 옆에서 지켜본 가장 오래된 사이인 김차장 외엔.


"어? 너 부모님 베트남에 계시잖아. 거기서 일 하시는 거 아냐?"


역시 김차장이 방어한다.


이쉐끼.


"여기 안 계시다고. 크크"


어차피 내 몫은 아니라 생각했다. 나도.


"아 뭐예요."


갑자기 한 목소리가 되어 덤벼든다.


-나도 가만 못 있지.


어차피 아이템이 중요한 게 아냐.

너는 내가 포장해 주지.


"사실, 김차장이 제일 불쌍하긴 해."


김차장은 실실거리면서도 눈을 크게 뜬다. 모두의 시선이 김차장에게 쏠린다.


"내가? 내가 왜? 결혼해서?"


그는 이미 결혼해서 토끼 같은 딸내미까지 있다.

그렇다고 결혼만 가지고 얘기하면 하수지이.


"넌 연애 한번, 그리고 바로 결혼이잖아."


"그런데 왜? 얼마나 낭만적이냐. "


"어, 그렇게 딱 한 번."


"뭐가, 뭐가 한 번인데."


"아아. 아~ 맞네. 우리 김차장님. 딱 한 번 해봤네."


먹잇감이 떨어졌다.


"뭐가 한 번이야. 아니야! 나 많이 했어!"


"앞으로 죽을 때까지 한 명이잖아요 어휴 울 형님. 어휴. 로맨티시스트."


역시 태수는 차장에게 장난칠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차장님 아니면... 사귀지 않아도 혹시? 자유연애? 막 막 그냥 눈 맞으면 막 그러셨어요?"


가만히 있던 규현도 어느 쪽 대답도 못하도록 거든다.


"사귀지도 않는 여자랑 키스해 본 적 있어?"


다시 한번 묻는다.


"어? 어? 아... 아니, 그럼 몇 명하고 하는데. 넌 몇 명인데, 너흰 다 몇 명하고 해 봤는데"


당황한 김 차장을 보며 웃음이 터진다. 그러면서 하나 둘 앞에 놓여있는 다이어리를 집어 들며 일어설 채비를 한다.


"저도 한 명보단 많아요."


과묵한 민상이 한마디를 던지고 먼저 일어선다.


"아냐, 아니잖아. 규현아 너는? 너 모태솔로 아니었어?"


"전 아직 이십 대 초반인데요..."


규현이 대답한다.

나머지 인원들도 모두 뭔가 납득이 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회의실 너머로 전화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왜 왜, 아니야. 난 행복해! 평생 한 명이라서 행복하다구!"


이제 절규에 가깝게 들린다.


"어구, 가야겠다. 차장님. 오늘의 위너. 행복하게, 마사지기 사모님 갖다 주세요~"


태수가 마무리 투수로 나서며 회의실 문을 연다.


그러게,

한 끝 차이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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