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츠고
아무리 일을 해도 공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지.
일은 주머니를 채우기 위한 수단일 뿐.
마음의 빈자리는 어떻게 채울 건데.
청춘이면 빠질 수 없는 게 어떤 건데.
인생은 뭘 위해 달리는 거지.
아니, 달리다 보면 도데체 뭘 만나게 되는 거지.
모르니까
정말 모르겠으니까.
계속 배우는 거야.
사랑하는 법을.
일이든.
사람이든.
고진감래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건물의 엘리베이터에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동창이라는 관계에서는.
"어이, 꼬. 오랜만이다. 너 여기서 일해?"
"어? 어 우리 사무실 여긴데. 너희도?"
그렇게 가깝다고도 멀다고도 볼 수 없는 그를 우연히 마주친 건 한 해의 마지막 달, 12월의 시작일이었다.
"아니, 난 거래처 만나러. 야- 꼬우리, 이렇게 보니 반갑네. 언제 밥 한번 먹자."
세상 가장 영혼 없는 말이라는 밥 한번 먹자.
하지만 나는 지나가는 말 같은 건 안 해.
"내일 점심?"
동창과 연애할 때는 지겹도록 함께 했던 그, 유정현. 전 남자친구의 친한 무리 중 일 인이다.
나의 연애가 끝나고 자연스럽게 그와의 연락도 끊겼었는데.
다시, 우연한 만남에서 점심으로 인연이 이어진다.
"이제. 다 잊었냐?"
순댓국을 사이에 두고 그가 떠보듯이 질문을 던진다.
-많이도 울었었지. 네 앞에서도.
"잊어야지. 하면 더 못 잊으니까 그냥."
들깨가루와 산초가루를 넣으며 답한다.
"바보냐? 걘 잘 살아"
"아씨. 사장님, 여기 소주 한병이요."
오후 근무가 남았지만.
주문해 그냥.
정현은 씩 웃으며 말한다.
"야, 내가 새로운 거 배웠는데, 너 내가 말아줄게. 사장님, 여기 콜라도 한 병 주세요."
소주잔에 콜라를 반쯤 채운 뒤 맥주잔에 빠트린다.
다른 소주잔에 소주를 반쯤 채운 뒤 그 위에 살짝 얹는다.
옆의 빈 틈은 맥주로 채운다.
"야, 이쪽 영업이 술이 다들 장난이 아니야. 그런데 이건 좀 맛있더라. 마셔봐. 고진감래주. 딱 너한테 필요한 거 아냐? 크크"
고진감래 주.
맛나다.
"사실 내가 부탁할 게 있는데. 너 밖에 해 줄 사람이 없어."
"뭔데, 나 밖에?"
"내 주변에 지금 너만 싱글이거든."
영업사원 맞구나.
빌드업을 왜 이렇게 잘해.
소개팅
꼭 뚫어야 할 곳이 있다며, 그 회사의 봉사활동 장소까지 쫓아갔다 했다.
그곳에서 정말 말없이 일만 하던 거래처의 담당자에게 말을 붙이기까지만 수개월.
이제 겨우 가까울 만큼 거리를 좁혀간 정현은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담당자가 원하는 것을 주려고 한다.
그것은 바로
소개팅.
"야, 걱정하지 마. 그게 무슨 어려운 일이라고."
기다렸다는 듯이 답은 했지만 오래 본 사이에서만 연애를 시작했던 나에게 소개팅은 전공분야가 아니었다.
대학 1학년때 처음으로 받아본 소개팅.
정찬을 쏙 빼닮은 의대생과의 소개팅 자리에 어색함을 이기지 못하고 중간에 기숙사로 도망갔었다.
주선자 언니에게 일 년 치 욕을 다 듣고 다신 소개팅 안 한다 결심했지만.
3학년이 되고 친한 친구의 부탁으로 다시 연결된 소개팅에서도 역시 두려움에 날짜를 미루고 미루고 미루다.
결국 상대방이 그 얼굴 한 번 보자며 무작정 강의실로 찾아와 놀라게 했던 일까지.
대문자 I.
이번엔 다르다.
나름 영업인 n연차인 데다,
친구의 밥 줄도 걸려있다.
의지와 함께 각오를 다진다.
-성공해서 남 주자.
예전, 심은하가 처음 방송에 출연하던 날 스태프의 90프로 이상이 분홍색 옷을 입고 왔다는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호감의 색 핑크. 신뢰의 색 블루라든가.
소개팅을 임하는 소녀의 색은 역시.
연한 핑크색 털이 복실한 니트를 골라낸다.
12월 31일. 저녁 6시.
레고레고레고
가보자고.
강남역 7번 출구
7번 출구를 나오면 옆 상가의 유리문 앞엔 사람들이 다닥다닥 서서 출구에서 나오는 누군가를 기다린다.
나도 빈틈 하나를 찾아 서서 유리에 비친 옷상태와 머리를 점검한다.
얼마 전에 잘라버린 귀밑을 겨우 내려오는 커트단발이 유독 짧게 느껴진다.
'오늘 마지막 날인데 밥 먹고 가.'
엄마집에 잠시 들렀을 때 엄마는 딸이 당연히 아무런 약속도 없이 마지막날을 보낼 거라 생각하고 얘기했다.
'오늘 친구랑 약속 있어. 내일 와서 먹을게!'
어떤 친구가 될는지.
친구는 될 수 있을는지?
입김을 호- 불어 본다.
"저. 고우리... 씨?"
영창 피아노 소리 같은 목소리에 뒤를 돈다.
말수 없이 봉사활동 하는데만 전념한다는 그 남자가 갈색 안경에 베이지색 코트를 입고 빤히 쳐다본다.
"헥? 아, 김진영..."
"네. 반갑습니다."
소개팅 좀 나가달라고 부탁하던 정현이 헤어지기 전 머뭇거리다 내뱉은 말이 떠오른다.
'그런데, 음... 그분이 모태솔로래. 공부만 해서 연애를 못한 거야. 어디 빠지는 데는 없어, 정말이야.'
나는 머리부터 발 끝까지 한눈에 그를 스캔한다.
정말이라고 까지 강조한 데는 이유가 있는 거겠지?
강한 긍정은 부정.
강한 부정은 긍정.
해도 안 보고 사는 사람처럼 얼굴이 투명하니 맑다.
끝이 살짝 올라간 짙은 눈썹은 왠지 본인만의 고집이 있을 것 같은 느낌.
귀는 얼굴에 비해 살짝 큰 편이고 곧은 콧대가 작은 얼굴 중앙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는 나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또렷이 나를 쳐다보다가 싱긋 웃어버린다.
피부보다 더 투명해 보이는 까만 두 눈이 미소로 인해 초승달이 된다.
S클래스의 길만 걸어왔다는 그 사람.
왁스로 삐죽삐죽 가운데를 세운 헤어스타일은 공부만 하고 살진 않았다고 말하는 듯하다.
아닌가, 편견인가.
'흠. 우리. 잘 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