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눈이이 (3)

나는 언제쯤

by 아는개산책

눈눈이이 (2)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다시 김부장


“됐다. 일이나 하자.”


하루에 해결할 일이 이 전시 한 건만은 아니다. 일정을 확인해서 공을 던지고 회신을 기다려야 하는 일들을 먼저 추린다.


그런데

또 메일이 뜬다.

이번엔 A사 김일권 부장이다.


이제 A사 이름만 봐도 일일드라마 제목이 연상된다.


도대체가 예측이 안돼.


+... 여하 불문하고 다시 진행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 인연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길 바라며, 금번 전시회 끝날 때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 김일권 부장 +


-읭? 뭘 부탁해?


이미 여아리 주임의 요청으로 진행은 취소된 상태다.


이번엔 내가 전화를 건다.


"아, 부장님 안녕하세요. 고우리입니다."


"네 차장님. 안녕하세요. 전화까지 다 주시고. 어젠 잘 주무셨어요?"


"아 네네네… 저 그런데 씁. 오전에 여아리 주임한테 전화 왔었는데, 이번 전시회 같이 진행 안 하신다고... 그래서 기계도 다시 내려보냈고… 다 취소했는데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아… 같은 사무실이 아니신가요?”


메일상 사무실 번호는 같은 걸로 돼있는데.


“아아, 제가 오전엔 주로 외근이라 밖에 있어서요. 그런데 차장님, 죄송한데 무슨 말씀이신지, 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하…


여차저차 -

나는 또 여아리의 말을 전한다.


-아니 한 회사 아니여? 뭔 소통이 이리 안돼?


자꾸만 삐딱해진다.


"아... 차장님. 여아리 주임이 뭔가 다른 거랑 헷갈린 것 같은데... 그냥 그건 다 잊으시고 제가 어제 통화드린 것처럼 그냥 해주시면 되십니다."


잠시 당황한 듯 보였지만, 끝까지 침착하게 말을 잇는다.

그렇지만 나도 당신들을 하루 겪어 본 사람.


"저. 그런데 일의 담당자가 여아리 주임이지요? 담당자가 안 하겠다고 한 이상, 저희도 그냥 진행하기가..."


고깝습니다만.


"아닙니다 차장님. 제가 책임집니다. 저희 이거 진행해야 해요. 기계는 그럼 지금 다시 부산으로 오고 있다고요?"


"네... 부장님."


기 빨립니다.


-지금 회사 상대로 둘이 장난하시나요?


생각을 꿀꺽 삼킨다.

그냥 못 넘어가.


"그리고, 저희 태국 파트너, 이번 전시회 공식업체한테까지 연락해서 저희랑 못하겠다고 문자를 보냈던데... 그렇게 저희랑 하고 싶지 않은 담당자랑 계속 일을 하는 게… 맞는지... 부장님, 죄송하지만 제가 다른 업체 소개해드릴 수 있어요."


이번엔 나도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다.


자존심?

왜 업무를 하는데 자존심이 나오는 거지?


줄다리기는 한 사람만 하는 게 아니구나.


"아니요, 차장님. 어제도 제가 말씀드렸는데... 저희는 차장님과 계속 진행할 생각입니다. 다른 대안은 생각 안 하고 있어요."


진심 어린 배려를 할 때엔 뭔가 가슴 깊이 울컥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마음도 아는 거지.

그 길이 쉽진 않아도 옳은 방향이라는 걸.


하지만, 서로를 깎아내리거나 비뚤어진 칼춤을 같이 추다 보면,

나도 모르게 드는 희열,

묘한 쾌감.


그리고 더 쉬워.

칼자루를 쥔 상태에서는 더욱.


나도

그저 그 정도의 사람일 뿐.


"그럼. 하... 여아리 주임한테 직접 메일로 주라고 해주세요. 자꾸 오더를 전화 한 통 걸어서 이랬다 저랬다 하시고... 뚝 뚝 끊어버리시는데. 원래 메일로 남겨주셔야 진행되거든요."


"아아, 네, 차장님. 그럼 제가 지금 바로 메일 쓰겠습니다."


"아니요, 부장님 말고 여아리 주임이. 직접 보내주세요. 그게 힘들면 그냥 다른 업체 소개해 드릴게요."


잠시 정적이 흐른다.

서로의 패를 읽는다.


-여아리가 망쳐놓은 이 관계, 우리가 한국 공식 파트너라는 걸. 다 아시는 거죠?


"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차장님."


어제의 들뜬 예의가 사라진, 사뭇 다른 목소리의 마지막 답신이 전해진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는다.


이겼나.


이럴 땐 나도 한 회사에 오래 함께한 선배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


언니.

이게 맞을까?

나.

이래도 될까?

아니면, 더 좋은 방법이 있는 걸까?


묻고 싶을 때가 많다.



전시회


오늘은 전시가 시작하는 날.

잡음을 안고 시작한 경우엔 오히려 더욱 신경 써야 할 1순위 업체가 된다.


괜한 트집으로 그래서 안 해준 거 아니냐는 말은 듣고 싶지 않으니.


끝내 여아리 주임은 메일을 보내지 않았고, 결국 김부장이 정말 죄송한데 다시 부탁한다는 내용의 메일을 보내왔다.


딸이건 말건 이제 궁금하지도 않아.


그렇다고 마냥 시간을 끌 수도 없는 노릇일뿐더러. 더 끌고 갈 승부욕도 남아있지 않았다.


어차피 말을 꺼냈다는 게 중요해.

결과가 따라오지 않더라도.


커피 쿠폰,

퉁.


하지만 진짜 문제는 태국 파트너였다.


+ms, she's crazy. 하루에 수십 개씩 같은 문자야. 빨리 해달라고. 우리는 더 빨리 할 수가 없어. 전시장 오거나이저가 정한 규정이 있다고. 알잖아? ms. 나는 더 설명할 수 없어. 오늘부터 대답 안 하고 있으니까 네가 그 여자한테 대답해 줘. 우리는 순서대로 할 뿐이라고. ok?+


한국인들의 빨리빨리는 해외에서 더욱 눈에 띈다.

모두를 불편하게 하는 빨리빨리.

같은 동남아에선 그래도 이해해 주는 편인데.

얘도 어지간히 시달린 듯하다.


그것보다.

여주임이 내 문자를 보기나 할까?


+주임님, 규정상 5시 이전에는 진행이 어렵습니다. 최대한 제가, 정말 최대한 파트너에게 제일 일 순위로 A사 것부터 진행하라고 얘기했습니다. 아니시면 저희가 사람을 한 명 보내서 지키게 할 테니 급한 일 있으시면 먼저 비우고 가셔도 되십니다.+


+이게 얼마짜린 줄 알고 부스를 비우고 가라는 거예요? 최대한 빨리 와주세요. 5시 돼도 안 오면 차장님 쪽에서 전부 책임지는 걸로 알겠습니다.+


의외로 회신은 칼같이 온다.

휴대폰만 보고 있나.


내용은 더 칼이고.


"뭔 책임. 하... 정말 쉽지 않네."


볶인다.

콩이 되어.

먼지가~~~ 되어~


태국 시간 4시가 조금 넘어가자 나의 심장도 어떻게 알고 요동치기 시작한다.


왓츠앱이 뜬다.


+ms. she's crazy. 하도 난리 쳐서 부스 왔는데 이미 다 가고 아무도 없는데?+


she's crazy를 몇 번이나 듣는 건지.

끝까지 재밌는 여자다.


그렇다고 나는 뭐.

나은 사람인가.


언제쯤.

어른이 되려나.


에휴, 한숨을 쉬는 와중에 전화가 울린다.


지이잉-


여아리?

일 줄 알았는데 얼마 전 내게 소개팅을 주선했던 고등학교 동창, 유정현이다.


"어? 정현아"


"어, 꼬. 뭐 해."


"이 시간에 일하지 뭐해."


생각이 꼬일 땐 한 템포 끊어주면

확실히 낫다.


"야이씨, 너는 소개팅을 했으면 보고를 해야 할 거 아냐. 만났어? 어땠어? 사겨?"


"아. 크크. 뭐래."


소개팅 보고.

이제 한다.


"알았어, 내일 만나. 만나서 얘기해."


성격이 급하다는 것도

상대적인 거다.


최고 급한 사람은 지금 태국에 있고.


잊자.

일은 일일뿐.

사무실 문을 나서면 다 읽은 책은

조용히 덮는 거다.


또는,

팍.



(끝)



이전 13화눈눈이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