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 (1)

단편 소설

by 아는개산책


솔이네


탁.


솔이는 다 읽은 책을 탁 소리가 나도록 덮었다.


매달 급여날이 되면 아빠는 솔이를 서점으로 데려간다.

어떤 책이든 자유롭게 책을 고를 수 있는 시간. 솔이는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위치해 있던 이달의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제목은 [12개의 자유]


"무서워."


솔이가 내뱉은 첫 감상평이었다.


주인공의 내면에 자리한 12명의 인격체가 각기 성장을 하며 삶에 혼란을 겪는 이야기다. 이런 종류의 글은 처음이었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솔이는 고작 초등학교 3 학년이다.


-내 안에도 내가 모르는 아이들이 자라고 있으면 어떡하지?


솔이는 자신이라고 오롯이 솔이 하나만을 품고 있다고 자신하기 어려웠다. 침대에 기대앉은 채 베개를 꼭 끌어안고는 덮어버린 책을 발끝으로 살짝 밀어냈다. 그러다 벌떡 일어나서 침대 옆에 있는 거울 앞에 섰다.


"보일까?"


-다른 인격이 있다면...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과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눈을 깜박여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다.


"솔, 밥 먹어. 뭐 해?"


방문이 활짝 열렸지만 엄마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환청일까? 다른 인격인가?


솔은 다시 거울 속의 자신과 눈을 맞춘다.


"아 빨리 나와! 엄마 나가야 돼"


엄마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거실에서부터 들려오자 솔이는 그제야 거울에서 눈을 떼어 의자에 앉혀놓은 곰돌이 인형을 잡아 올렸다.


"가자, 밥 먹으래."



보라네


틈 하나 없이 꼭 닫혀 있는 회색의 현관문 앞에서 솔이는 쭈뼛쭈뼛 들고 있는 비닐봉지를 만지작거린다.


달마다 자리를 바꿔 앉히는 담임 덕분에 이번 달은 굉장한 부잣집 그중에도 외동딸이라고 소문난 보라와 짝꿍이 되었다.


-외동딸...


형제가 넷이나 있는 솔이는 굉장한 부자는 잘 모르지만 외동딸이라는 것이 신경 쓰였다. 아니, 신경이 쓰인다는 감정보다도 부러움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하지만 아직 어린 솔이는 감정을 정확히 규정하는 데는 서툴렀다.


'우리 집에 놀러 올래?'


집에서는 남자형제가 둘이나 있어 '제발 엉덩이 좀 붙여'라는 소리를 듣는 천방지축이지만, 밖에서는 천상 내성적이고 수줍음 많은 소녀였다. 숙제처럼 묵직하게 놓여있던 첫인사를 보라 쪽에서 먼저 해맑게 건네주었을 때 솔이는 마음속으로 뛸 듯이 기뻐했다.


약속했던 토요일이 다가오자 솔은 엄마에게 허락을 구했다.


'엄마, 나 오늘 보라네 집 갈 거야. 횡단보도 건너에 동백아파트 있지? 거기 산대. 다녀올게!'


'다녀와. 빈손으로 가지 말고 뭐라도 들고 가.'


뭐가 뭐인지는 정확히 말하지 않은 엄마였다.


솔이는 냉장고를 뒤져 아직 뜯지 않은 요구르트 한 줄을 비닐봉지에 넣었다. 요구르트는 솔이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 중의 하나였다.


철컥-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나 했더니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아?"


보라의 아빠로 보이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자 솔이는 자기도 모르게 비닐봉지를 뒤로 감췄다.


"아, 보라 친구야? 하하 보라야! 친구 왔다!"


솔이가 자신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저씨는 집 안을 향해 크게 말하더니 솔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재밌게 놀아"


"네, 네... "


땅을 향해 대답하자마자 두두두두 땅이 울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이내 머리를 하나로 땋아 올려 잔머리 하나 보이지 않는 보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솔아! 왔어?"


환하게 웃고 있는 보라가 들고 있는 바비인형, 미스코리아 띠를 두르고 있는 바비인형처럼 예뻐 보였다.


"아... 안녕."

"안녕. 들어와."


보라는 몸을 비껴 서서 솔이가 들어갈 수 있는 틈을 내주었다. 주저하며 현관으로 들어간 보라는 장난감 하나 바닥에 놓여있지 않은 거실을 보고서야 남의 집에 왔다는 사실이 실감되었다. 그리고는 바로 운동화를 벗은 자신의 양말을 내려다보았다.

얼마 전에 엄지발톱 쪽에 동그란 구멍이 난 양말이 있었는데.


오늘도 그 양말을 신고 있었다.


-아씨...


"헤헤 와줘서 고마워! 내 방 구경할래?"


"응 보라야. 초대해 줘서 고마워."


솔이는 소리 내어 책을 읽는 것 같은 말투로 대답했다. 보라가 그런 솔이를 보며 바비인형의 손을 들어 인사를 한다.


"이거 이번에 미스코리아 모델로 새로 나온 바비. 예쁘지?"


"응 예뻐."


솔이는 포장되어 있지 않은 바비인형을 본 게 처음이었다. 몇 번인가 갖고 싶다고 말해봤지만 들은 척도 안 하던 엄마였다. 형제가 많은 솔이는 포기도 빨랐다.


보라는 일명 보라방으로 안내했다. 양말은 구멍이 있을 뿐 더러운 것도 아니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살금살금 고양이 걸음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방에 들어서자 '우와'하며 예상치 못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솔이의 입에서.


연분홍의 벽지로 둘러싸인 방안에 하얀 레이스가 달린 캐노피가 침대를 두르고 있다. 더욱 놀라운 건 침대가 있어도 책상도, 책장도, 작은 화장대까지 있어도 걸어 다닐 공간이 충분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깨끗했다.


"이거 볼래?"


보라는 솔의 손을 잡고 본인 키보다 조금 높은 장식장으로 끌어당겼다. 그제야 아직 비닐봉지를 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솔은 '아, 이거' 하며 보라에게 봉지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어? 요구르트네? 우리 집에 많은데. 헤헤 고마워. 너도 요구르트 좋아해?"


솔은 말없이 윗입술을 물고는 천천히 고개만 한번 끄덕였다. 보라는 생긋 웃어 보이더니 봉지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너 얘네들 본 적 있어? 나 세트로 다 가지고 있거든."


보라는 다시 장식장 앞에 서서 유리를 손으로 콕 찍었다. 먼지 한 톨 묻어있지 않은 유리 안에는 실바니안 인형이라 불리는 작은 크기의 인형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와. 너무 귀여워. 엄청 많다."


"응 가족별로 다 있어. 얘네 맨 앞줄에 있는 애들이 이번에 아빠가 일본 갔다가 사 온 거야."


솔이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장식장 앞에서 넋을 잃고 인형을 쳐다봤다. 하나하나 모양과 표정까지 제각각인 인형들. 감히 갖고 싶다고 상상도 못 해본 인형들이 족히 서른 개도 넘어 보였다.


"너도 얘네 좋아해?"


"응? 응. 그냥..."


"갖고 싶지? 하나 줄까?"


"나? 아니... 괜찮아."


솔이의 입에선 생각할 새도 없이 괜찮다는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솔이는 보라의 눈을 쳐다봤다. 보라는 눈도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다.


그 순간 현관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거실 쪽에 인기척이 들려왔다.


"어? 엄만가?"


보라는 바비인형을 든 채로 거실로 달려갔고 솔이는 혼자 방에 남았다. 잠시 주춤하던 솔이는 하얀 자수의 폭신 해보이는 이불 위로 살짝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옆에 놓인 요구르트가 들어있는 비닐봉지가 눈에 들어온다.


-아, 이거... 갖다 줄까.


거실에 다시 나가야 할지 말지 망설이는 사이에도 보라는 들어올 생각을 않고 있고, 거실에선 어른의 말소리가 섞여 들리는 게 엄마인 것 같았다. 솔이는 손가락 끝을 마주 잡고 손톱만 문질러댔다.


이 방은

예쁘지만

어색했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규정하기에 솔은 아직 너무 어렸다.



학교


솔이 오백미리 우유에 빨대를 꽂아넣고 반쯤 마셔갈 때쯤 교실에 도착했다. 이미 학교에 도착한 아이들도 꽤 있었다. 여느 날처럼 각각 두세 명씩 무리를 지어 이야기가 한창이다. 솔의 자리에는 이미 앉아있는 보라 외에도 세정과 현숙이 보인다.


"안녕."


솔은 인사를 하며 신발주머니에서 실내화를 꺼내 바닥에 놓았다.


"어, 안녕."

"안녕."


"솔아, 너 혹시 인형 못 봤어?"


현숙의 말에 갑자기 보라가 현숙의 오른손을 꽉 잡는다. 자리의 공기가 평소와 다르다.


"인형? 봤어. 어제 보라집 놀러 갔다가..."


머릿속에 강하게 각인된 작고 예쁜 인형들을 다시 떠올렸다. 솔이는 그것들을 한번이라도 가까이서 보았다는 것만으로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그럼... 네가 가져간 거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정이 물었고 솔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보라를 쳐다봤지만 보라는 눈을 내리깐 채 솔을 보고 있지 않았다.


"뭐를... 가져가?"


세정과 현숙은 말없이 솔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계속 쳐다보면 얇은 종이 한 장도 뚫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솔의 동공이 한없이 흔들렸다.


-뭐가... 내가... 뭘... 가져갔나??


솔도 움직임을 멈추고 엉거주춤 선채로 세 사람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마치 솔과 보라의 자리에만 시간이 멈춘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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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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