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미안해 (1) 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솔이네
솔이는 주말에 입었던 옷을 집어 들고는 주머니를 모두 뒤집어 탈탈 털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은 옷을 침대 위에 던져놓고 이제 평소 잘하지도 않던 방을 청소하며 이 잡듯이 뒤지다 보니 어느새 100원짜리 동전 너덧개만이 손에 쥐어져 있었다.
"말도 안 돼."
학교에서부터 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리고 책가방을 던져놓고 방을 들었다 엎고 나서도 이 말을 멈출 수 없었다.
솔이는 다시 침대 위로 올라가 곰돌이 인형을 품에 안고 토요일의 하루를 최대한 상세히 기억해 보려 노력했다.
인형을 구경하고... 인형이 예뻤다.
그러자 바로 껑충하고 교실 안으로 생각이 옮겨가더니 보라와 현숙 그리고 세정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인형 세트 중에 하나가 없어졌대. 얘네 아빠가 일본에서 사 온.'
'뭐?'
솔이 자리에 앉아 책상 위에 놓인 보라의 손을 잡았다. 보라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솔이를 바라봤다.
'보라야, 정말 없어?'
'오늘 아침에 내가 세어봤는데... 하나가 없어졌어. 방에 들어온 사람은 너밖에 없는데...'
보라는 떨리는 목소리로 얘기하는데 본인이 오히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려 한다.
-네가 왜 울어...
솔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그날의 일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머릿속도 까맣게 타버렸는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말 예뻤어... 하지만 가지고 싶진 않았는데. 난...
본인 것이 될 수 없는 것에는 욕심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내 안의 다른 인격이 있는 거라면? 그래서 욕심내서 훔치려 들었다면?'이라는 생각이 끼어들자 솔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바란 거야?
'솔아, 그냥 미안하다고 하고 다시 돌려주면 되잖아.'
'그래, 그냥 미안하다고 해.'
현숙과 세정은 거의 동시에 솔에게 훈계하듯 얘기했다. 한 명은 보라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한 명은 두 손을 합장하듯 손을 모으고 있었다.
'더 이상 도망갈 데가 없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네가 범인 맞잖아. 더 뻔뻔해질 거야?'라고 묻는 듯했다.
솔은 더 이상 그 자리에 그대로 버티고 앉아있는 것이 힘들었다.
'미... 안 해...'
닫아놓았던 문이 벌컥 열리자 솔은 기억의 틈에서 빠져나왔다. 언제 집에 온 건지 언니가 얼굴을 빼꼼 내밀고 쳐다보고 있다.
"나 책 빌려왔는데, 볼래? 보고 싶으면 한 권에 오백 원."
여섯 살의 나이차이가 나는 언니는 항상 어디선가 재밌는 책을 그것도 최신유행 만화책을 여러권씩 빌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렇게 집에 오는 날에는 만화책을 좋아하는 솔이에게 대여비를 받고 책을 보여주었다.
"언니 혹시... 돈 좀 빌려주라."
"나 돈 없어."
사탕을 문 입으로도 오백 원은 똑바로 말하더니 빌려달라는 말에는 우물우물하고 말을 흐린다.
"꼭 갚을게. 있는 거 좀 빌려줘. 한... 이천 원...?"
솔이는 아직 문 앞에 서있는 언니 앞으로 달려와 무릎을 꿇으며 두 손을 싹싹 빌었다.
"제발. 제발..."
놀이터
이미 해가 지고 있어 빨갛게 물들어가는 놀이터 안으로 솔이가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녀의 손에는 검정 봉지하나가 들려있다.
조금 전 솔이는 언니와 오빠에게서 빌린 돈 오천 원을 꼭 쥐고 문방구로 한달음에 뛰어갔었다.
하지만 막상 문방구에 도착했을 땐, 자신이 보았던 인형과 비슷한 종류의 것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하물며 그 인형이 무슨 인형인지 설명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저... 저기... 쥐 모양인데요. 아니 귀여운 인형인데.. 이... 이만한 거요.'
어렵게 설명을 해보려 애썼지만 문방구를 지키고 있던 언니는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표정으로 솔을 쳐다봤다.
'아... 모르겠는데. 그런데 그렇게 작은 인형은 없는 것 같은데... 뭘 찾는 거니 꼬마야? 울지 말고 얘기해 봐.'
입을 삐죽삐죽 대던 솔이는 그 말 한마디에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한참을 서서 긴 울음을 쏟아내고 있었다. 손님이라고는 꼬마 솔이가 전부였던지라 점원도 더 말리지는 않고 그저 그 작은 아이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그리고는 받아 든, 안경 쓴 귀여운 쥐가 그려진 연필통과 지우개. 솔이가 쥐고 있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그 두 가지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사라질까 솔이는 봉지의 입구를 단단히 여미고 소중히 품에 안았다.
잠시 후 문방구에 구비된 전화기로 보라네 집에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를 받은 그녀의 엄마는 보라가 학원에 가고 집에 없다고 전해주었다. '아, 네가 솔이니?' 하는 말과 함께.
솔의 머릿속은 어지러웠지만 보라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결국, 보라네 집 앞에 있는 놀이터에서 한 시간 뒤에 온다는 보라를 기다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비어있는 그네에 걸터 서서 앞으로 뒤로 움직여보다가 그네 위로 올라앉았다. 올려다본 하늘에는 구름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내가 저 구름이고 싶어.' 솔이는 하늘을 보다 다시 터질 것 같은 눈물을 꾹 밀어 넣었다.
-왜 우는 거야... 이유도 모르면서...
바보 같았다. 자신의 모습이. 정확히 기억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자신도 없는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솔은 힘껏 발을 굴려 그네를 탔다. 높이 그리고 더 높이 하늘에 닿을 수 있을 만치 높이 올라갔다. 그리고 가장 높이 올라갔다고 느낄 때쯤 솔은 반동을 이용해 그네에서 뛰어내렸다. 점프를 성공하면 이 일도 잘 해결될 거야 하고 순식간에 든 생각이었다.
"악!"
바닥에 닿는 순간 발목이 제대로 위치를 잡지 못했다. 솔은 비명을 지르며 발목을 감싼 채 주저앉았다. 그러자 참고 있던 울음이 다시 터져 나왔다.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서 혼자, 그 시간 속으로 다시 갈 수 있다면 꼭 기억하겠다고 울먹이는 작은 여자아이 위로 가로등 불빛이 은은히 비추고 있었다.
"솔아!"
어디선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솔은 어깨를 들썩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익숙한 그 목소리는 '안녕'하고 해맑게 인사하던 보라의 목소리와 닮아있었다. 아니, 솔의 앞으로 달려오는 진짜 보라의 모습이 보였다.
"보라야... 으아앙앙"
솔은 보라의 이름을 부르며 울음을 참으려 했지만 더욱 크게 새는 눈물을 막을 길이 없었고, 보라는 달려오자마자 솔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눈을 맞췄다.
"솔아, 미안해. 나 기다렸어? 흐어엉"
그리고 곧바로 보라도 울음을 터트렸다. 보라의 울음소리가 귀로 전해오자 희한하게 솔의 눈물이 그대로 마르기 시작했다.
"뭐.. 뭐야... 보라야... 왜 울어... 왜 그래... 나 오래 안 기다렸어."
"흑흑... 흑... 끄윽... 엉... 미안해 보라야. 내가 미안해."
보라네
학원에 가기 전 보라는 티브이를 보고 있는 엄마옆으로 가서 살이 맞닿도록 앉았다. 그러자 엄마는 한 손을 들어 보라의 어깨를 다정히 감싸며 물었다.
"학교에선 별일 없었고?"
"엄마... 나... 아빠가 사준 인형세트... 인형 한 개 잃어버린 것 같아."
"응? 인형? 얼마 전에 아빠가 사 온 인형세트?"
"응... 오늘 아침에 세워보니까 11개 밖에 없었어. 박스에는 분명 12개라고 적혀있는데... 아빠한텐 말하지 마. 아빠가... 속상할 수도 있어."
"응? 아빠가 왜 속상해. 후훗. 그리고 그 인형 원래 열한 개 들어있었는데?"
"아니야! 엄마 몰라?"
보라는 벌떡 일어나서 방으로 달려가서 접어놓았던 박스를 가지고 나왔다. 분명 12개 들입 이라고 쓰여있었다.
"어~ 그거 원래 12개인데, 하나가 귀가 떨어져 있었대나, 그래서 새 상품으로 구해준다고, 아빠가 먼저 11개만 받아왔다던데? 마지막 주인공 아이가 품절이라 구하기 어려운 거였나 봐. 아마 지금쯤 택배 오고 있을걸?"
눈을 동그랗게 뜬 보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오전 내내 학교에서 얼굴이 벌게진 채로 말 한마디 없이 누워만 있던 솔의 모습이 떠올랐다.
보라가 몇 번인가 괜찮다고 말을 건네려 했지만 솔은 머리를 묻은 채로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엄마... 아... "
"학원 갈 시간 다됐네. 숙제는 다 했"
엄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보라는 박스를 바닥에 내동댕이 치고는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곧바로 가방을 들고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응? 그렇게 가기 싫어하더니. 이제 학원이 좋아졌나 보네."
엄마는 중얼거리며 다시 티브이로 시선을 옮겼다.
집을 나온 보라는 방에서 찾은 주소록을 뒤져 솔이의 집을 확인했고 솔이의 집으로 달려갔지만 솔이는 이미 나간 후였다. 문을 열어주었던 언니라는 이는 솔이가 문방구에 갔다고 전해주었고, 보라는 다시 문방구로 달려갔지만 그 동네에는 문방구가 세 개나 다른 곳에 위치해 있었다.
세 곳의 문방구를 모두 찾아갔지만 솔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결국 내일 학교에서 제대로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걸어가는 길이었다.
"바보 멍청이 김보라..."
한심한 자신의 모습이 한심한 크기만큼 긴 그림자가 보라의 발끝에서부터 붙어 있었다. 다리를 툭툭 두드리며 걷다가 집 앞 놀이터에 가로등이 막 켜지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 가로등 앞으로 빛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한다.
"뭐지...?"
발걸음이 먼저 이끄는 대로 놀이터에 들어선 보라는 그토록 찾아 헤맨 솔이가 그네를 타는 모습을 먼저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솔아!라고 외치려는 순간 솔이가 그네에서 뛰어내렸고 바로 발목을 감싸며 옆으로 쓰러져버렸다.
"소... 솔아!"
솔도 보라도 터져버린 수도꼭지처럼 흘러나온 눈물이 그쳐갈 때쯤 그제야 서로 마주 보며 피식피식 웃었다. 솔은 머뭇머뭇하며 검정봉지를 내밀었다.
"내가... 똑같은 걸 사고 싶었는데... "
"솔아! 미안해. 정말 미안해!"
다시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솔을 보라는 꽉 껴안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놀이터에도 키가 큰 가로등 불빛이 꼬마아가씨 둘을 밝게 비춰주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