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수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악마 하나를 키우고 산다.
평소엔 숨죽인 채 날개를 접고 앉아있지만
주인이 무너지는 순간이 오는 때엔
몸을 펴고 일어나 난도질을 대신한다.
싸움은 모두 악마대 악마의 전쟁.
누가 더 에너지가 높은 악마인가.
악마인가.
가까이서 들여다봐도
과연 악마인가.
악마의 형상으로 보이는
천사는 아닐까.
실체를 누가 알아
이름은 각자가 알아서 붙이는 건데.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게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전화
지이잉, 지이잉
아침부터 연신 휴대폰이 울려댄다.
-토요일인데... 니미...
배게 옆에 놓인 휴대폰에 손을 뻗는다.
한쪽눈만 살짝 떠서 발신인을 확인한다.
-김대리... 태수?
예상 밖의 이름이다.
근무시간 외에는 회사 관련 전화는 아예 받지 않는다는 것을 회사사람들은 모두 안다. 서로 노는 물이 다르다고 잠정적 결론을 낸 태수, 김대리마저도 나를 잘 안다.
그런 애가 토요일 아침부터 전화를?
"왜"
나는 아직 목이 잠겨있다.
"차장님. 큰일 났어요."
"왜"
"차장님. 나 이번엔 진짜 사고 쳤어."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는 누구에게 쉽게 본인 잘못을 시인하는 아이가 아니다.
안하무인 유아독존.
그의 선명한 캐릭터다.
유아독존이 무너질 일이 무언지.
사실 이유야 많긴 하다.
그만큼 그는 늘 제멋대로였으니까.
그와 통화를 하고 있는 와중에 전화 하나가 더 걸려온다.
"어, 잠시만."
귀에서 휴대폰을 떼어 화면을 바라보니 이번엔 김대리와 앙숙처럼 지내며 늘상 앙앙거리는 막내 현주다.
-먼 일이 나긴 했네. 어휴.
어제는 부서회식이 있었다. 돌아가면서 술을 마시고 게임도 하고.
오랜만에 모두들 꼭지가 돌도록 들이켰지만, 근래 들어 술을 많이 하지 않는 나는 잠시 화장실 타임으로 부산해졌을 때 집으로 일찌감치 도망 와서 잠이 들었었다.
태수에게 금방 다시 전화하겠다고 말하고는 현주의 전화를 연결했다.
조금 더 객관적인 정보가 필요했기에.
"어, 현ㅈ.."
"차장님, 큰 일 났어요."
현주는 내 말까지 자르며 다급하게 말하고 있지만 왠지 흥이 나 있다.
"왜"
"어제 김차장님이 김대리 주먹으로 쳤어요."
오늘의 속보를 전하듯 또박또박 천천히 말하는 그녀다.
-헐. 미쳤다.
태수가 면접을 보던 날, 딱 붙는 검정 스키니진에 검은색 긴 가죽재킷을 입고 와서 회의실을 한번 쭉 훑어보았었다. 나와 김차장 둘은 맞은편에 앉아 있었는데 우리는 서로 말은 안 해도 마음속으로는 도리도리 고갯짓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질문으로 김차장이 왜 우리가 당신을 뽑아야 하냐고 영어로 물었을 때 그는 영어로 말했다.
'저는 인생, 바닥치고 왔어요. 무슨 일이든 주시면 어떻게든지 만들어 내요. 진짜요. 저보다 더 간절한 사람 아마... 없을 걸요?'
스물일곱이 하는 말치고는 꽤 단단했고 우리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그를 채용했지만 서로 먼저 가르쳐보라고 하다가 결국 김차장이 그를 맡았다.
그런데 그는 말만 뱉어보는 아이가 아닌 행동으로 증명하는 아이였고 한 번도 뚫지 못한, 아니 누구 하나 도전해보지 못한 기관에 가서도 어떻게든지 일을 가져와서 우리 회사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입사 후 일 년 만에 그의 성과는 신입 중에서도 눈에 띄게 월등했고 성과급도 꽤 많이 챙겨갔었다.
하지만.
늘 그의 발목을 잡는 것은 그의 말투. 그리고 태도였다.
위아래 없이 존칭에 반말을 섞는 것도 그랬지만 가장 중요한 건 기본적으로 그는 모두에게 필요 이상으로 공격적이었고 소소한 친절에도 늘 방어적이었다. 그래서 그가 있는 곳엔 항상 긴장감이 맴돌았다.
나는 그런 태수가 사자 무리 안에서도 기죽지 않은 척 으르렁 거리는 작은 호랑이 새끼 같았다.
그렇게 그도 어느덧 3년 차가 되었고 같은 팀이 아닌 나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날이 늘었다.
항상 별 반응 없이 흘려듯는 듯한 나한테 제대로 좀 들으라고 악을 지르다가도 그래서 더 편하다고 말하는 아이였다.
나는 다른 직원들에겐 가장 관심이 없는 회사원인데.
현주는 자세히 어제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밤 12시가 넘어가자 다들 적당히를 넘어서 과하게 취하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누군가 노예게임을 하자고 제안을 한 것이다.
대학시절에나 들어봤음직한 그 단어. '노예게임' 이라니. 그 말만으로 대충 상황이 그려졌지만 나는 앞뒤가 궁금해졌다.
우연인지 의도였는지 태수는 직속상사인 김차장을 노예로 엮었고, 바닥에 무릎을 꿇어보라 했다 한다.
-이미 미쳤네.
"그래서, 김차장이 무릎 꿇었어?"
-아무도 안막고 뭐 한 거야 대체. 일 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어이가 없다.
"아휴, 거기 있던 사람들 진짜 다 취했어요. 엄청. 저만 멀쩡했다니깐요? 김차장님도 술에 완전 취해가지고 정신없이 그냥 바닥에 앉더라구요. 분명히 웃는 거 내가 봤거든요. 분위기 괜찮았어요 그때까진 다."
현주는 전혀 술을 해독하지 못한다. 그래서 늘 술집에서 일반 음료를 시켜 마시면서 끝까지 남아 잘 노는 애였다.
"아니 처음부터 그딴 게임을 왜 하냐."
"차장님, 그런데요. 그게 다가 아니고, 들어보세요. 김차장이 무릎 꿇으니까 김대리가 김차장 뒤에 의자에 앉았어요."
아.
부엌으로 나가 물을 따랐다.
목이 탄다.
"다들 미쳤어."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 숙취가 올라온다.
"차장님, 놀라지 마요. 그 또라이가 차장님 어깨에 발 올렸어요."
잘 못 들은 것 같다.
"뭔 소리야?"
"김대리, 아웃. 장난 아니죠? 그 전만 해도 분위기 좋았거든요? 그런데 김차장님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진짜, 제가 봤는데 눈이 확 돌았더라고요. 바로 김대리 멱살 잡고 주먹. 날렸어요."
"헐."
나는 들고 있던 물을 마시지 못하고 턱, 내려놓았다.
나도 태수 때문에 운 기억이 많다.
아무도 믿지 못하는 사람은 크고 작은 전쟁으로 이미 사람에게 질릴 대로 질린 사람.
나는 그의 상사였지만 그의 묘한 감정싸움에 끼어들지 않으려고 겉으론 무던하게 있다가도 끝내 옥상에서 화를 삭이며 울게 되는 날도 있었다. 우연히 옥상에서 그런 내 모습을 마주한 김차장은 태수와 해외 출장길에 자주 동행하면서 이제는 그를 좀 이해할 수 있다며 나에게 조금만 더 내려놓으면 된다고 달래던 동기 녀석이었다.
"그런데 더 미친 건 뭔 줄 아세요?"
"아니야. 안돼."
"김대리도 같이 멱살 잡고 주먹으로 치려고 하는 거예요. 그때 부장님이 없었거든요? 담배 피우러 나갔었나? 전화하고 오셨었나. 그런데 딱 그때 들어오신 거예요."
부장은 무조건 김차장과 한 배다. 둘은 서로 죽고 못 산다.
"부장이 김대리 뒤통수 완전 세게 치고 멱살 잡고 끌고 나가는데. 와, 저 부장님 그렇게 화난 거 처음 봤잖아요. 부장님 화 잘 안 내시잖아요."
부장의 그 오랜 운동으로 다져진 단단한 체구로 70킬로도 겨우 넘을 것 같은 김대리를 질질 끌고 가는 낯선 장면이 그려졌다.
"아..."
"걘 끝났어. 그쵸 차장님? 김대리, 차장님한테도 연락 없었죠?"
"야... 누가 걔야. 에휴, 일단 알았다... 거기 누구 있었어? 다 봤어?"
"차장님만 빼고 다 있었죠. 그런데 다 꽐라 돼가지고. 그래도 아마 기억하겠죠? 아이, 차장님은 왜 맨날 이럴 때만 없어요. 진짜 장난 아니었는데. 살면서 처음 봤어요 이런 거"
-나도 살면서 처음 듣는다.
전화를 끊고 소파에 털썩 쓰러지듯 앉았다.
우리 부서는 유난히 무던한 사람들이 많다.
적당한 선 안에서 까불면 적당히 우쭈쭈 넘기지만...
선을 넘어버리면.
사고가 된다.
한 끝차이.
탈출구가
있나?
나는. 역할이 있나?
바로 김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사이에도 전화가 울리는 것이 태수였다.
-이제 애가 타냐. 으이그.
연결을 바꾸지 않고 김차장과 연결한다.
"어, 고차장. 너 뭐 들었어?"
낮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 김차장은 토요일 아침인데도 내가 전화할 거라는 것을 이미 예상한 듯 바로 말을 시작했다.
"뭔 일이야 대체."
"누구한테 들었냐? 아니, 다 필요 없고 넌 그냥 아무 얘기하지 마. 난 걔랑 이제 일 같이 못해."
"야... 밥은 먹었냐. 이 말도 하지마?"
"아씨 너.. 헛 참..."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김대리를 두고 한바탕 옥상에서 토론을 했었다. 근래 들어 몇 번인가 나와 같은 팀으로 일해보고 싶다고 말하던 태수였기에 김차장에게 넌지시 의견을 물었었지만 본인 아니면 케어가 안되니 더 데리고 있겠다 말하던 그였다.
'그래라 그럼. 영혼의 짝꿍 됐냐? 크크. 내가 보기에도 걔는 나쁜 애는 아니야. 그냥. 음... 잘 모르는 애? 그래도 많이 나아졌다. 그리고 희한하게 나는, 만약에 내가 죽으면 걔는 진심으로 통곡할 거 같아. 장례식장에서.'
'야, 고차장니임! 나도 진짜 통곡할 거거든? 너는 진짜 그런 무서운 소리 좀 하지 마라'
우리는 그렇게 주고받으며 웃었었다.
나나 김차장은 둘 다 김대리 내면의 상처가 먼저 보였었다. 그래서 그렇게 사람들 사이를 헤집으며 싸움을 걸고 다녀도 그를 직접적으로 어찌해 볼 생각자체는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
진짜 무언가를 해야 한다.
무언가.
할 것인가.
두고
볼 것 인가.
내가...
내가?
(다음 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