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도.
인사
"어머, 이게 누구야?"
"아, 회사 동생"
나는 태수가 90도 인사를 하는 것을 보고 픽 웃으며 바로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화장실이 급하다.
"아빠, 나 왔어"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나던 아빠는 리모컨을 든 채로 손인사를 한다.
"오, 우리 왔냐."
잠시 후, 나는 거실이 보이는 부엌 쪽 테이블에서 물을 마시면서 세 명의 조합을 지켜본다.
말 한마디에도 장난을 싣는 아빠와 생각나는 말은 무조건 하고 보는 엄마. 그리고 잔뜩 얼어서 굳어버린 태수. 태수는 사과와 포도가 놓여있는 작은 협탁을 앞에 두고 무릎을 꿇은 채 앉아있었다.
-무릎은 왜 꿇어, 웃긴 놈이네. 큭.
"태수야, 무릎 풀어"
태수가 고개를 들어 제발 가까이 와 달라는 눈빛을 보낸다.
-으흐흐흐흐 싫은데.
나는 평소엔 부모님께 회사 얘기를 일절 꺼내지 않는다.
외국에서 걱정만 하실게 뻔하기도 하지만 늘 특별할 게 없는 똑같은 일과일 뿐이므로.
그저 출국해, 귀국했어. 이 정도가 전부였다.
"우리 잘생긴 직원분은 이름이 뭔가?"
아빠가 한마디를 던지자 엄마는 포크로 사과를 찍어 태수에게 건넸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앉았어, 편하게 앉아요. 밥은 먹었나?"
태수는 바짝 얼은 상태로 사과 하나를 건네받으면서도 고개를 대여섯 번을 숙이며 감사하다 말한다.
'아, 나더러 어쩌라고오!' 하면서 차 안에서 방방거리던 그를 떠올리니,
꽤 대조적이다.
"어, 뭐라고? 내가 잘 안 들려서, 김..?"
얼마나 모기만 한 소리로 대답하는지 아빠는 두 번 세 번 물어 그의 이름을 들었다.
"우리 우리는 회사에서 어떻게, 잘해요?"
아빠는 갓 대리에게 갓 차장의 성실을 묻는다.
나는 물을 삼키다 컥컥하고 기침을 했다.
"네네 아버.. 아.. 너무 똑똑하시고 착하시고. 저도 많이 가르쳐주시고. 아주 좋습니다."
-지가 무슨 말을 하는지나 알까.
들고 있는 사과를 한 입도 베어 물지 못하고 덜덜 거리는 태수를 나는 새삼 신기하게 쳐다봤다.
"아, 우리 대리님이 너무 긴장되나 보다. 아이고. 편하게 있어도 되는데. 우리 우리가 힘들게 하죠? 쟤가 둘째라 똑 부러지는 데가 있어서. 그렇게 생각 안 해도 남 상처 주는 말을 잘하지. 쟤 동생도 쟤한테는 꼼짝 못 하거든."
-응? 엄마? 나 말하는 거 맞아? 언젠 최고 순둥하다더니?
"저, 말... 편하게 놓으셔, 놓으, 놓아주세요..."
"아니, 회사 손님인데. 아휴. 그래도 되나?"
벌게지는 태수의 얼굴을 보며 이번에는 내가 부엌 테이블에서 한마디를 던졌다.
"엄마, 말 놔. 걔 애기야. 그리고 우리 좀 이따 가야 돼. 일 있어. 나 그냥 차 가지러 온 거야."
"뭘, 밥도 안먹고 갈라고?"
엄마는 일어나서 부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작게 귓속말로,
'정말 무슨 사이 아니야?'
"하하, 진짜 아니야. 그냥 회사 동생인데. 오늘 같이 거래처 장례식장 가야 돼가지구. 여기 근처야."
"어어. 그런데 저렇게 착해가지고 일은 어떻게. 잘 하냐. 네가 좀 잘 챙겨."
"그냥 하는 거지 뭐."
나도 보는 것만 잘해, 엄마.
주차장
주차장에 내려오자 그제사 태수는 굳어있던 얼굴을 풀었다.
"난 내 차 가져갈 테니까, 거기 도착해서 만나. 같이 들어가게."
"차장님, 이거 어떡해?"
집에 온 손님을 그냥 보낼 순 없다며 엄마는 시골 큰어머니가 보내준 복분자 주 페트병 두 개를 그의 손에 들려주었다.
"어, 그거 맛있어. 너 그런 거 안 먹어?"
"아니요! 없어서 못 먹지. 이렇게 귀한 거를. 하... 너무 감사한데."
"그려, 잘 먹어. 아, 내 차 저기 있다. 나 간다."
"차장님, 잠깐만 잠깐만 있어봐."
그는 회사 차 문을 열어 복분자 주 두병을 안쪽으로 밀어 넣더니, 금세 주차장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렇게 십여분 후 땀 두 방울을 달고 돌아온 그의 손에는 과일바구니와 음료수 한 박스가 들려있다.
"헐. 김태수."
-맨날 돈 없다고 징징대는 애가.
"누나, 이거 금방 갖다 드리고 가자."
-귀찮네.
"그러다 진짜 남자친구인 줄 알겠다"
"미쳤어요?"
엘리베이터에서 장난을 친다.
거칠게 자랐다더니.
다정하기만 하네.
오늘은 하루 종일 계획에 없던 일만 일어난다.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온 태수는 우리 부모님 앞에서는 그리 무겁던 입을 다시 활짝 연다.
"차장님 아버님 말씀하시는 거 들었어?"
"뭘?"
"고차장님 잘 부탁한대요. 그리고 누나한테 상처받지 말라는데. 뭐야. 어릴 때 어떻게 산 거야."
태수는 웃으며 차 문을 연다.
"흐흐흐 나도 몰라"
회사에서의 나는 진짜 나일까.
나는.
원래 어떤 사람일까.
회사
일요일 하루의 휴식만으로는 몸의 컨디션이 모두 회복되었다 말하기 어렵다.
아니, 월요일의 기본값인가.
-졸려...
사무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퇴근을 열망한다.
하지만 나는 곧 두 눈에 들어오는 광경에 남아있던 잠이 꼬리를 끊고 달아났다.
김차장이 태수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그 뒤로 김부장이 활짝 웃으면서 막 사무실을 나가려고 한다.
한 손에는 커피, 한 손에는 담뱃갑.
그 사건이 있기 전의, 여느 보통날처럼
"어이, 고차장 주말 잘 보냈어? 우리 지금 옥상 갈 건데, 갈래?"
시계를 보니 아직 8시 20분.
아침의 옥상은 분명 깨끗하고 맑은 공기가 있겠지.
하지만.
"안가. 갔다 와"
그리고 곧장 탕비실부터 들러 커피를 내린다. 언제 봤는지 유나 과장이 쪼르르 다가와 말을 건다.
"차장님, 차장님. 들으셨어요?"
"나 지금 왔어."
천하장사 소시지 하나를 까며 대답했다.
"금요일, 우리 회식 때. 차장님 가고. 뭔 일 있었는지... 현주가 전화하지 않았어요?"
"다들 엄청 마셨다며. 너도 있었어?"
"네. 들으신거죠? 저 김차장님 그렇게 화내는 거 처음 봤거든요. 김부장님도."
내려진 커피에 물을 섞고 얼음을 가득 담았다.
내 커피를 들고 있음에 행복을 느낀다.
"그래? 지금은 멀쩡한데?"
"그러니까요! 이게 뭔 일이래요. 저 진짜 제가 꿈꾼 줄 알았잖아요? 아침에 보고."
커피를 들고 자리로 돌아가는 데 유나는 본인 자리로 갈 생각이 없다.
"언제 화해했지? 주말에 만났나? 그래도 시말서는 쓰겠죠?"
"모르지"
"하긴... 차장님이 어떻게 아시겠어요. 제가 알려드려야 그때나 아시는 분인데."
"어. 아니, 저 셋은, 못 헤어져."
김차장은 다음날 옥상에서 마주치자 자연스럽게 그날 일을 얘기했다.
'저번 토요일 밤에 김대리 우리 집 왔거든. 밤새 술 먹고. 막 질질 짜고.'
'잘했네'
'부장님은 그래도 그냥 넘어가는건 아니라고. 시말서는 쓰라했어. 아휴 그래도 내 새끼인데. 걔가 누구한테 기대겠어. 많이 외로운 애야. 너도 예쁘게 봐줘'
격할 땐 한없이 격해지고
유할 땐 한없이 유해지는
사람의 마음은 한 방향으로만 뛰나.
'예쁘게 어떻게'
'그냥 가끔 말도 들어주고 밥도 사주고'
'나 바빠'
'그래, 바쁘지. 그렇지. 음.'
하지만 김차장의 말을 듣기도 전에 이미 김대리는 토요일 밤 당일에 내게 전화를 했었다.
'나 김차장님 집 가보려고요. 집에서까지 화내진 않겠지? 나 무서워. 어떡해 차장님.'
'집에선 죽이진 않을 걸'
콕 집어 말해주지 않아도
스스로 먼저 알고 있는 상황.
잘생기고 착한 김대리는, 뭘 해야 하는 지 이미 알고 있지 않나.
시간이 많이 흐르고서도 김대리는 종종 나의 부모의 안부를 물었다.
"차장님, 부모님 한국 오셨어요? 건강하시죠?"
"네가 뭔데 고차장님 부모님 안부를 물어."
그럴 때마다 옆에 있는 다른 직원들이 의아해한다.
특히 나와 가장 가까운 사이라 여기는 김차장이 그렇다.
"고차장님 부모님 엄청 좋으셔. 고차장님은 대체 누구 닮았어요?"
"미쳤냐"
좋은 말 오면 좋은 말 가고
애정 오면 받고 더블.
"김차장 너도 와서 인사해."
"어? 어어, 해야지, 그럼."
김대리는 말미엔 꼭 한마디를 더한다.
'진짜. 차장님, 복분자 최고. 살면서 먹어본 것 중에 최고.'
1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