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사일생 지옥은 면하다.
이 작품은 실제 사건들을 참고해 만들어졌지만, 인물과 장소, 사건의 구체적인 전개는 모두 허구입니다. 현실의 특정 인물이나 사건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내용의 현실감을 위해 변호사의 감수를 받으며 집필하고 있습니다.
작품에는 성범죄 및 폭력적인 장면, 성인 대상의 묘사가 포함될 수 있으니 이용에 참고해 주세요.
광기로 얼룩졌던 펜트하우스의 밤은 짧았다. 다음 날 아침, 숙취와 흥분이 가라앉고 차가운 이성이 돌아온 한승호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바닥에 주저앉아 공포에 질린 수아의 모습을 본 그는 스스로 경찰서로 향했다.
하지만 자수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았다. 승호는 감금 및 폭행 혐의로 즉각 구속되어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철창 너머로 상길을 마주한 승호의 얼굴은 얼이 나가 있었다.
"변호사님, 제가 미쳤었나 봅니다. 제 발로 경찰서에 갔으니 선처가 되겠죠?"
상길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대표님, 자수는 양형에 참작은 되지만 지금 혐의가 가볍지 않습니다. 접근 금지 명령을 어긴 데다, 감금까지 했어요. 피해자 최수아 씨는 감금 폭행이라고 주장하고 있고요. 무조건 피해자와 합의를 해야 합니다. 처벌불원서가 없으면 실형을 피하기 힘듭니다."
"합의요? 내 수십억을 뜯어간 년한테 또 고개를 숙이라고요?"
"감옥에서 몇 년 썩으실 거면 안 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지금은 자존심 세울 때가 아닙니다."
죽기보다 싫었고 굴욕 같았지만 구치소의 생활은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자기 보다 10살은 어려 보이는 놈이 문신은 잔뜩 하고 방장이라고 말도 안 되는 군기를 잡으려고 하는 건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상길이 변호사 사무실에서 직접 수아를 만났다. 수아는 팔에 깁스를 한 채 상길을 맞이했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피해자의 두려움보다 철저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합의금으로 1억 가져오라고 하세요. 안 그러면 저 절대 합의 안 해줍니다. 한승호, 그 안에서 평생 썩게 놔둘 거예요."
소식을 들은 승호는 구치소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쳤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주변에서 돈을 빌려 현금 1억 원을 끌어모아 수아에게 건넬 수밖에 없었다.
며칠 뒤, 로펌 사무실. 합의서와 처벌불원서에 도장을 찍기 위해 수아가 나타났다. 깁스는 온데간데없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치장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서류에 미련 없이 도장을 찍고는 계좌번호를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 변호사님, 고생하셨네요."
수아는 핸드백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상길의 책상 위에 밀어 놓았다. 강남 최고급 텐프로 룸싸롱의 주소와 함께 '마담 수아'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승호의 피 같은 돈으로 결국 자신의 가게를 차린 것이었다.
"저희 가게 오픈한 지 얼마 안 됐거든요. 오픈 빨로 강남 에이스들 쫙 모아뒀으니까 변호사님, 일하시다 스트레스 풀 일 있으면 언제든 놀러 오세요. 제가 잘 모실게요."
상길은 명함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하이힐 소리가 사무실을 빠져나가고 나서야 박 사무장이 혀를 끌며 들어왔다.
"저게 피해자 맞습니까? 아주 승승장구하네요. 남의 돈으로 호강하면서."
합의서 덕분에 승호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구치소 문을 나선 승호는 곧바로 상길의 사무실을 찾았다.
초췌한 몰골로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승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강 변호사님. 저 이제 어쩝니까. 가정은 다 박살 났고, 평생 일군 회사 지분 절반에 수십억 현금까지 그년한테 다 털렸습니다. 전 이제 빈껍데기예요."
상길은 따뜻한 커피를 내밀며 담담하게 말했다.
"대표님. 변호사라고 늘 홈런만 칠 수는 없습니다. 접근 금지 위반에 감금 폭행까지 갔던 사건입니다. 집행유예로 나오신 것만 해도, 이번 재판은 2루 적시타는 친 거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일단 바깥공기 마시게 된 걸 다행으로 생각하세요."
승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을 훔쳤다. 상길은 그를 착잡하게 바라보며 서류를 정리하려던 참이었다.
그때, 상길의 시선이 승호의 손목에 머물렀다. 승호가 차고 있는 스마트워치 화면 구석에서 작은 빨간 점이 일정한 간격으로 깜박이고 있었다. 수많은 성범죄와 형사 사건을 다뤄온 상길의 직관이 반응했다. 저건 녹음 앱이 켜져 있을 때 나오는 표시였다.
"대표님. 혹시 지금 우리 대화, 녹음하고 계십니까?"
상길의 날카로운 질문에 승호가 화들짝 놀라며 손목을 가렸다.
"아, 아닙니다! 변호사님을 못 믿어서 그런 게 아니라... 이게 제 오랜 버릇입니다."
승호가 서둘러 스마트워치를 조작하며 변명했다.
"제가 사업 초창기에 사기도 크게 당해보고, 하청업체나 고객사 놈들이 나중에 말 바꾸는 걸 하도 많이 겪어서요. 그래서 사람 만날 때나 통화할 때는 무조건 녹음기를 켜두는 게 습관이 됐습니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상길의 머릿속을 스치는 강렬한 직감이 있었다.
"대표님. 그럼 혹시... 수아 씨와 오피스텔에서 나누었던 대화나 통화 내용도 전부 녹음되어 있습니까?"
"네? 아... 뭐, 네. 제 클라우드 계정에 자동 동기화되니까 전부 다 남아있긴 할 겁니다. 근데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이미 다 끝난 일인데."
"대표님. 지금 당장 클라우드 접속해서 파일 다 뒤져봅시다."
상길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박 사무장까지 합류해 수백 개의 녹음 파일을 밤새워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벽 동이 틀 무렵, 상길이 마침내 책상을 강하게 내리쳤다.
"찾았습니다!"
스피커를 통해 수아의 콧소리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빠, 이혼 소송 들어가면 그 마녀 같은 여자가 오빠 재산 다 뒤질 텐데 어떡해. 일단 오빠 회사 지분 남은 거랑 현금, 전부 내 이름으로 돌려놔. 내가 안전하게 잘 맡아줄게. 오빠 나 못 믿어?]
[그래, 수아야. 네 명의로 계좌 하나 새로 파라. 내가 50억 정도 쏠 테니까, 이혼 마무리될 때까지만 네가 좀 보관하고 있어 줘.]
상길이 의자에 깊숙이 기대며 입꼬리를 올렸다.
"대표님. 연인 사이에 오간 돈은 법적으로 증여, 즉 그냥 준 돈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돌려받기 힘듭니다. 하지만 이 녹음 파일은 다릅니다. 이건 증여가 아니라 임치내지는 위탁관리로 보는게 맞습니다, 즉 민법 제693조임치는 당사자 일방이 상대방에 대하여 금전이나 유가증권 기타 물건의 보관을 위탁하고 상대방이 이를 승낙함으로써 효력이 생긴다. 제699조 임치기간의 약정이 없는 때에는 각 당사자는 언제든지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돈과 지분을 잠시 보관해 달라고 맡긴 거라는 완벽한 증거입니다."
승호의 흐리멍덩하던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 그럼 그 돈... 다시 찾을 수 있는 겁니까?"
"당연하죠. 수아 씨가 룸싸롱을 차렸든 펜트하우스를 샀든, 부당이득 반환 청구 소송을 통해 싹 다 가압류 걸고 찾아올 수 있습니다."
상길은 서랍에서 새로운 위임장을 꺼내 승호 앞에 내밀었다.
"자, 대표님. 2루타로 끝날 줄 알았던 경기가 아직 안 끝났네요. 3루타까지 도루 한번 해봅시다."
몇 달 뒤, 서초동 법원 앞. 부당이득 반환 청구 소송에서 승소 판결문을 손에 쥔 상길과 승호가 법원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수아가 빼돌렸던 회사 지분과 현금 대부분을 되찾는 완벽한 승리였다. 멀리서 화려한 명품 옷을 입은 수아가 변호사들과 함께 악을 쓰며 전화를 거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텐프로 룸싸롱과 펜트하우스는 이미 상길이 걸어둔 가압류로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강 변호사님... 정말 감사합니다. 변호사님 눈썰미가 아니었으면 평생 억울해서 피 토하다 죽었을 겁니다."
승호가 상길의 손을 꽉 쥐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상길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승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상길의 시선이 멀리 하늘을 향했다. 1루에서 끝날 수도 있었고, 2루에서 만족해야 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집요함과 작은 단서 하나가 결국 3루타를 만들어냈다. 상길은 법원의 차가운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다음 타석을 준비하듯 걸음을 옮겼다.
감수 : 경찰간부 출신 마성의 변호
김판수 변호사
( youtube.com/@policelawyer_p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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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 전문 변호사〉가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요청에 힘입어 주 1회에서 주 2회 연재로 확대됩니다. 기존 일요일 연재에서 변경되어, 다음 주부터 매주 금요일 오후 7시 / 토요일 오후 7시에 찾아뵙겠습니다. 더 촘촘하고 밀도 있는 이야기로 보답하겠습니다. 늘 관심과 응원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