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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비너스와 니케

결핍의 미학에서 배운 하루

by 윤담

다음 날, 파리에서의 첫 아침.

동행은 오후에 도착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오전은 혼자서 동네를 구경하며 보내기로 했다.


‘내가 있는 동네가 유난히 깔끔한 편인 걸까? 아니면 파리가 생각보다 덜 지저분한 건가?’

파리는 미리 들었던 악평과는 달리, 생각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다.


거리를 걷는 내내 '깔끔하고 우아하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는데,

중간중간 마주치는 작은 공원들은 마치 내가 오래도록 꿈꿔온 파리의 이미지 그대로였다.


교과서에서 보았던 유화 속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한 기분.

“아, 진짜 그림 속에서 봤던 형형색색의 꽃이 이런 느낌이구나…”


예술가들이 왜 이곳, 파리로 모여들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거리마다 멋스럽게 차려입은 사람들도 인상적이었다.
스위스에서는 한 번도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옷들이, 여기서는 트렌치코트 하나쯤은 꼭 사야 할 것 같은 기분을 자극했다. 예쁜 머플러도 함께.


그렇게 혼자만의 파리 오전을 충분히 누리고 있을 즈음, 동행이 도착했다.



짐을 놓고 다시 나와 가볍게 동네를 산책하고, 백화점에 들러 과일과 와인, 간단한 저녁거리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동행은 영국에서 넘어왔고, 나는 스위스에서 파리로 이동한 참이었다.

서로 다른 경로로 여행해 온 만큼, 그동안의 여정을 나누며 수다꽃을 피웠다.


와인의 취기가 살짝 감도는 기분 좋은 상태에서 우리는 편안하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9시에 시작하는 루브르 박물관 투어를 위해 이른 하루를 시작했다.


“분명 여행은 힐링하러 온 건데… 왜 매일 아침 이렇게 일찍 일어나는 걸까? 매일이 피곤해...”

동행이 웃으며 툭 던진 농담에 나도 피식 웃었다.


그런데 그 순간,
숙소를 나서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모든 피로를 날려 보냈다.

붉은빛 여명이 부드럽게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저녁엔 노을이 있다면, 아침엔 이런 여명이 있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우와! 언니, 지금 하늘 너무 예쁘다!”

들뜬 마음으로, 그렇게 또 하루를 기분 좋게 시작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며 붉은 하늘을 향해 몇 번이고 셔터를 눌렀다.




루브르 투어는 ‘정말 힘들기로 유명하다’는 말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에,
우리는 아침부터 든든하게 챙겨 먹기로 했다.


'파리에 왔으니, 역시 빵으로 시작해야 하지 않겠어?'

바게트의 고향, 프랑스 파리.


우리는 바삭하게 구워진 바게트 안에 얇게 썬 햄, 토마토, 피클이 소박하게 들어간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나는 여느 때처럼 카푸치노를 곁들였다.


딱히 특별한 재료가 들어간 것도 아니었는데,
재료 하나하나가 신선하고 맛이 깊었다.
거친 바게트의 표면에 입천장이 살짝 까지는 느낌이 들 정도였지만,
그조차도 아깝지 않을 만큼 끝까지 맛있게 해치웠다.


"언니, 나는 정말 빵순이라 행복해..."

"밀가루나 빵을 싫어하는 사람이면 유럽 여행 오기 진짜 힘들 것 같아."

입 안 가득 퍼지는 바게트의 고소한 향과 함께, 그렇게 또 하루의 에너지를 채웠다.




루브르 박물관은 정말이지, 가이드 없이 혼자 돌아다녔다면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봐야 했을까 싶은 곳이었다. 공간은 미로처럼 복잡했고, 작품은 방대했고, 나에겐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오늘 우리를 이끌어 준 가이드님은 정말이지 ‘전문가’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분이었다.
1분 1초도 허투루 쓰지 않고, 쉼 없이 설명을 이어가며 작품 하나하나에 의미와 이야기를 불어넣어 주셨다.


잔잔한 어투 속에 은근히 위트 있는 농담도 섞어주시는데,
그 농담 하나를 놓치지 않으려고 더더욱 귀를 쫑긋 세우게 되었다.


그렇게 집중해서 들으며 작품을 바라보니
단순히 ‘그림’이나 ‘조각상’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시대, 맥락, 감정까지도 함께 보이기 시작했다.


루브르는 ‘본다’기보다 ‘배운다’는 느낌에 가까웠고,
그래서 더욱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그중에서도 내가 유독 인상 깊게 보았던 작품은
‘밀로의 비너스’‘사모트라케의 니케’였다.


팔이 없는 비너스, 얼굴이 없는 니케.
흔히 ‘결핍’이라 부를 수 있는 그 미완의 모습이,
오히려 완벽함보다 더 큰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여백의 미라고 해야 할까.
모자람 속에서 풍겨 나오는 힘과 존재감,
그리고 그 자체로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울렸다.


완벽해서 사랑받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이미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그 두 조각상이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혹시 나도 부족한 모습이 있다면, 그 자체로 나를 더 사랑해 줘야겠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다짐했다.



교과서에서만 보던 작품들을 실제로 마주하니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신기했고,
생각보다 훨씬 거대한 크기와 압도적인 존재감에 잠시 말을 잃었다.


더 많은 작품을 보고 싶었지만
예정보다 훨씬 빠르게 체력이 고갈되었고,
다음 일정으로 예약해 둔 성당 관람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이동하면서 간단하게 요기를 하기로 했다.




시떼섬으로 넘어가는 길.
배도 고프고 지친 상태에서, 우리는 여기저기 가게를 기웃거리며 식사할 곳을 찾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에 드는 곳이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결국 한참을 무작정 걷다가,
간신히 한 가게에 들어가 자리를 안내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옆 테이블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는 것.

평소에도 담배 냄새를 유독 싫어하는 나였기에,
마치 내가 담배를 피우는 것처럼 연기가 훅훅 밀려오는 게 견디기 힘들었다.


몸도 피곤했고, 배도 고팠고, 순간 감정이 먼저 올라와
동행에게 감정 섞인 말투로 툭 내뱉고 말았다.


“아… 나 여기 못 있겠어. 담배 너무 싫어해서…
언니는 뭐라도 먹고 와. 난 먼저 가서 줄 서 있을게. 연락 줘!”

그리고는 도망치듯 가게를 빠져나왔다.


혼자 시떼섬을 걷는 동안
마음속에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내가 왜 그렇게까지 얘기했지…?’
‘좀 참을걸. 아니면 자리를 바꿔달라고 해보지 그랬어…’
‘언니 혼자 남겨두고 나오다니, 많이 당황했겠지…’

감정이 앞섰던 그 순간이 민망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다음에는 여행 일정을 짤 때
좀 더 여유 있게, 시간을 넉넉히 두고 계획해야겠다는 걸 절실히 배웠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동행과 만났다.


"언니 내가 그냥 가서 당황했지 미안, 뭐라도 먹었어?"

"괜찮아~ 나도 담배냄새 힘들어서 대충 먹고 왔어"


그렇게 미안한 마음을 전했고

이번엔 기대하던 생트샤펠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보기 위해 입장 줄을 찾았지만…
입구부터 찾기 힘들어서 또 한참을 헤맸다.

'하… 정말 안 맞는다…'


그렇게 들어간 생트샤펠.
하늘을 찌를 듯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앞에 섰지만

내 마음은 좀처럼 반응하지 않았다.

찬란한 빛과 색은 아름다웠지만,
그 안의 이야기들이 내게는 읽히지 않았다.
그냥 복잡하고, 멀게만 느껴졌다.


기대가 컸던 탓일까.
그 화려함도 내 감정을 건드리지 못했다.

우리는 노트르담 앞 벤치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기로 했다.


어쩌면 지금 필요한 건, 무언가를 ‘보는 것’보다
그저 ‘쉬는 것’ 일지도 몰랐다.






배도 고프고 지친 와중에,
무작정 정처 없이 걷다 보면 감정이 더 예민해진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래서 다음 목적지는 무조건, 여유를두고 충분히 찾아보고 가기로 했다.


동행과 함께 다음 행선지 근처에서 식당을 검색해 봤는데,
하필 관광지 바로 앞.
‘별로면 어쩌지…?’ 싶었지만, 지금 상황에선 선택권이 없었다.


그런데 웬걸 예상과 달리, 정말 맛있었다.

직원도 친절했고, 내부도 깔끔했다.


“역시 미식의 나라 프랑스…!”


처음 먹어보는 달팽이 요리는 거부감 하나 없이,
익숙한 골뱅이 같아서 의외로 잘 넘어갔다.

오리 요리는 풍미 깊은 소스가 정말 키포인트였고,
소스를 한 방울도 남기기 싫어서 그릇을 싹싹 긁을 정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사랑 감자튀김.

서양 감자는 전분이 거의 없어 그런지
별다른 기술 없이도 바삭바삭하게 튀겨져 있었다.

고소하고 담백해서, 아무런 소스 없이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고생 끝에 큰 보상을 받은 기분이야.
여긴 진짜 맛집 인정이야!”


기분 좋은 포만감이 배 속을 채우고, 마음까지 따뜻해졌다.


우리는 그렇게 여유로운 걸음으로,
식당 바로 앞에 위치한 뤽상부르 공원으로 향했다.




뤽상부르 공원은 정말이지, 내가 딱 좋아하는 풍경이었다.
파리에서 만난 수많은 공원 중 가장 마음에 들었고
어쩌면 이번 유럽 여행 전체를 통틀어 가장 좋았던 공원이었다.


“와... 진짜 난 파리가 여행 중에 제일 마음에 들어.”
“여기 그냥 한참 앉아서 멍 때리고 있어도 돼?”



잔잔하게 흐르는 분수 소리,
바람에 부딪혀 바스락이는 나뭇잎,
그리고 형형색색으로 피어 있는 계절의 꽃들.


찾아보니 이 공원에 심어진 꽃들은 계절마다, 분기마다 바뀐다고 했다.
매번 찾아올 때마다 새로운 꽃이 피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곳은 충분히 특별했다.


해가 지며 노랗게 물들어가는 풍경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바라본 그 장면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이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아마 내가 파리에 산다면 매일 이 공원에 와서 멍하니 앉아 있었을 것 같고,
계절마다 달라지는 풍경을 그림으로 남기며 자연스럽게 화가가 되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긴 하루가 저물었다.


계절마다 꽃을 다시 피우는 공원,
보물 같은 예술품이 가득했던 루브르,
그리고 하루의 피로를 따뜻하게 감싸준 노을.


파리는
로마도, 스위스도 좋았지만
그보다 더 낭만적인 도시였다.




‘그때그때 피는 꽃을 심는다’는 이 공원처럼,

내 하루도 그때그때 감정을 심고, 때론 예기치 못한 순간에 피어나는 여백들을 품어야겠구나.


비너스와 니케의 여백,

그리고 나의 미완성.


그 결핍 속에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하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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