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현대의 미술은 시대적 변화의 영향으로 그 이전의 고전 작품과 달리 비교적 직관적으로 향유하기가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 미술은 더 이상 미(美)의 모방과 직관적 기술에만 국한되지 않고, 추상적이고 은유적인 복합 매개로 기능한다. 이로 인해 현대 미술에선 전시나 작품을 단번에 이해하기엔 어려운 모호한 지점들이 많으며, 매개된 맥락을 읽어야 현대 미술의 작가 의도를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 이번 《IMA Picks 2024》의 테마는 일민미술관의 설립 이념인 ‘예술적 실천’과 상당히 밀접해있는데, 김민애(b.1981), 백현진(b.1972), 차재민(b.1986)은 이렇듯 다분히 드러나는 복잡 미묘한 지점들 속에서, 각자 만의 어법과 예술적 실천으로 드러내고자 했던 맥락을 목격하고 경험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나아가 현대 사회 속 예술가로서의 존재 의미에 대해 저마다의 방식대로 우직하게 답변하고자 하는 것이 여실히 느껴지는 전시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빛 이야기 Stories of Visible Spectrum》에서 선보이는 차재민의 신작 〈광합성하는 죽음 Photosynthesizing Dead in Warehouse〉은 스크린 속 시각 매체를 매개로 유리관 속 부패 중인 과일을 인공적인 죽음으로 묘사한다. 이는 죽음의 속성을 초현실적 영역으로의 소멸이 아닌 목격가능한 변화로 치환됨을 보여주며, 죽음이라는 개념 및 속성을 가시적인 변화로써 은유한다. 이미지와 평행하는 자전적 내레이션은 예술과 삶의 유기적 연결성을 보여주며, 차재민이 의도한 예술적 실천의 맥락을 드러낸다. 이어지는 《담담함안담담함 라운 지》에서는 덜어내는 연습에 치중한 백현진의 예술적 실천이 더욱 강렬하게 드러난다. 최소한의 요소로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냄과 동시에 내재된 이야기를 담담히 내뱉는 어법은 작가가 작품을 매개로 은유한 내러티브를 관람객들로 하여금 비교적 직관적으로 와닿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보다 정갈하게 덜어내고자 의도했던 작업물들을 정돈되지 않게 전시 공간에 흩뿌려 놓은 그의 예술적 실천 방식은 전시의 소제목과 제법 잘 어울렸다.
《화이트 서커스》는 앞서 언급한 예술적 실천을 통해 맥락을 드러내는 본 전시의 테마와 가장 밀접한 김민애의 기백이 여실히 느껴졌던 공간이었다. 입장하자마자 마주하는 〈관람 혹은 관망〉과 〈은폐, 위장, 방어〉는 작품과 공공물의 경계를 흐리게 느껴지게끔 했다. 마치 뒤샹이 처음 항공박람회를 관람한 후 프로펠러를 공학적인 물건이 아 닌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서 받아들였던 사건이 상기되었다. 또 기존 구작을 실내 장식으로서 재조형한 프로젝트 룸 공간은 애초에 전시를 위한 물리적 공간인 화이트큐브로부터 탈피되어 있었다. 이처럼 물질과 공간의 관념적 구성을 탈피하고 재구성하는 시도는 기존의 관념으로 속박된 한계와 틀을 부수고 해체된 관계에 다시금 맥락을 부여하는 김민애의 예술적 실천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시도와 더불어 그의 조각이 대부분 좌대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미술가로서의 현실과 미술의 관계성을 그의 방식대로 재정립했기 때문인 듯하다. 이렇듯 다소 다채롭고 소란스럽게 느껴지는 이 공간을 관람하고 관망하는 관람객들에게는 본 전시가 현대 미술로 치환된 일종의 서커스처럼 보였다.
이렇듯 각각의 작가는 복잡하게 얽힌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이자 작업과 전시를 매개로 그 징후의 이면을 들춰내고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대화하고자 했다. 그들이 들춰내고자 했던 현대 사회의 미덕은 유연성과 급진적인 변화에 있다. 다원적이고 다면적인 기준을 내세우고 관점주의가 나날이 팽배해지는 지금, 현대의 예술가들은 현명하고 지속가능한 답을 내리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워졌다. 각각의 영역이 갖고 있던 기존의 가치나 고유의 경계가 무너지게 되면서 복잡하게 얽혀있는 모호한 지점들이 발견되는 것이다. 결국, 맥락을 읽을 수 있어야 이 가변적이고도 복잡 미묘한 사회적 동향의 출처와 본질을 찾을 수 있고, 쉽게 생겨나고 사라지는 변화의 흐름에 편향되지 않도록 올곧게 서 있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관람객들로 하여금 그들의 이야기가 상당히 얇고 피상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게 된다. 오래도록 기억되기보다 쉽게 생겨나고 쉽게 소비되어 사라지는 현재의 팝업스토어 전시 시장이 그러한 예다. 이는 일시적으로 동향과 흥행을 이끌 순 있겠지만, 시대적 흐름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성질은 지속력이 얕을 수밖에 없다. 결국 말의 설득력을 잃은 줏대 없는 예술가는 오래 기억되기 힘들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 속에서 예술가의 존재 의미는, 예술적 실천을 통해 이렇듯 유동적이고 모호한 사회적 동향의 맥락을 읽고 다시금 부여하는 것, 나아가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시사하는 것에 있다. 본인 만의 어법으로 시대적 흐름에 저항하고 해체하고 재구성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그들의 예술적 실천 태도에서 짙은 지속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직관의 지나친 결여는 곧 작가의 의도와 관객의 해석 사이에 큰 간극을 초래할 수 있는데, 이는 많은 관람객들이 전시 및 작품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느끼거나, 관람객 스스로가 미술에 대해 무지하다고 느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본 전시 같은 현대 미술은 누구나 쉽게 공감하고 향유할 수 있는 것에서 벗어나, 다소 어려운 접근성으로 소통의 단절을 초래할 수 있다는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 이는 여전히 아쉬운 부분이지 않을 수 없다. 본 전시에 삽입된 텍스트들 역시 학문 및 철학적인 전문 용어가 다분하며, 더군다나 작품으로 매개된 작가의 예술적 실천이 직관적이기보다 은유적으로 드러난다. 물론 본래 현대 미술이라는 것이 단순한 미적 감상보다는 복잡 미묘하고 유동적인 현대 담론을 다루는 사회적-정치적 맥락이나, 본 전시처럼 모호한 사변적-철학적 개념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기에, 사전 배경지식이 없는 일반 관람객들에겐 여전히 이해하기가 쉽지만은 않은 전시였을 것이다. 결국 이러한 현대미술이 더 많은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작품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쉽게 해석할 수 있도록 돕거나, 관람자들로 하여금 접근성을 낮추고 예술적 영감을 고양시킬만한 장치적 요소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 물론 난해하고 복잡한 현대 사회 담론을 다루는 것만큼, 그 맥락을 재구성하고 전달하는 과정에서 접근성이 낮도록 풀어내는 것이 쉽지 만은 않은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앞서 설명한 그들의 예술적 실천도 결국 갤러리와 전시를 매개로 불특정 다수에게 드러내고 있기에, 그들의 실천적 태도가 조금 더 직관적으로 가미된다면 그들 이 읽은 맥락이 더 많은 대중들에게 와닿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적으로 본 전시의 작가들이 본 전시를 통해 현대 사회 속 예술가로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여전히 우직하게 잘 드러낸 것 같다고 느꼈다. 본 전시의 작가들, 더불어 현대 예술가들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각자 만의 예술적 실천을 통해서, 모호한 지점 속에서 보이지 않는 맥락들을 발견하고 해체하고 재정립하며 은유하기를 반복할 것이다. 그 방식은 시대 양상에 따라 가변적 일지 몰라도, 앞으로도 끊임없이 지속될 그들의 예술적 실천을 통해 그들이 전달해 줄 가치들은 시간이 지나도 부동적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향후 더 많은 현대 예술가들이 피상적으로 동시대 미술사조나 현대 사회의 동향을 쫓아가는 것이 아닌, 꾸준한 예술적 실천을 통해서 세계의 이면을 바라보는 새로운 맥락과 시선에 대해 우직하게 발언했으면 한다. 앞으로도 분주히 유동하는 세상 속에서도 꾸준히 부동할 그들의 기저로 재정립된 날카롭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