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주윤
〈피에르 위그전〉이 AI를 사용한 전시라는 것을 알고 갔다. ‘아 어렵겠구나’라는 것을 짐작하고 갔지만 이리도 어려운 줄은 몰랐다.
〈피에르 위그전〉은 첫걸음부터 자유로움을 통제한다. 안내 직원의 ‘어두우니 조심하세요’ 등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입장할 수 있다. ‘최근 조도가 낮은 전시는 많은데 어두우면 얼마나 어둡다는 거지?’라는 생각을 품고 전시 서문을 읽으러 가게 된다. 서문을 이해하기 위해선 앞에 서서 문장을 계속 곱씹어야 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하려고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전시 보기를 마음먹게 된다. 뒤돌아 전시장을 들어서니 〈어둠 속의 대화〉 전시를 방불케 하는 암실 전시를 마주한다. 그리곤 큰 스크린을 마주하게 되는데, 화면은 얼굴이 없는 나체인 여성이 괴상한 행동을 하며 공간을 떠도는 것을 보여준다. ‘뭔가 미래적인 것’을 마주하게 되는 감각을 느끼게 되었다.
미래적인 것은 무엇일까? 최근 들어 미래적인 것에 대한 감각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필자는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 백남준, 그리고 백남준〉에 다녀왔다. 백남준의 작품은 2020년대를 살아가는 MZ세대가 보기에 이미 사용할 대로 사용하고 그 쓰임새가 파악된 매체인 텔레비전이나 모니터 등을 사용한 작품이다. 익숙한 것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 낯설지 않고 편안하며 어떻게 활용했는지에 집중하게 된다. 이는 전시에서 사유할 지점을 스스로 찾게 만든다. 그러다 1990년대 혹은 2000년대 초에 백남준의 작업을 마주한 사람들은 어떤 감각으로 백남준의 작업을 바라보았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당시 그들은 무엇부터 느꼈을까?’라는 의문을 계속 품고 있었을 때, 피에르 위그를 마주했다. Chat GPT가 나오고 세상은 AI전쟁터가 되었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2023년에 “내년(2024년)은 생성형 AI 상용화의 원년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었다. 지금, 2025년은 AI가 탑재된 다양한 기기들이 나오는 중이지만 모두가 그런 기기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 상태이며, 다수는 AI가 아직 와닿지 않는다. 그런 입장에서 피에르 위그의 작업은 이를 어떻게 활용했는가를 보기 전에 ‘낯섦’이 우선으로 느껴진다. 어렵고 낯설다. 낯섦이 가득한 공간을 우리는 게다가 앞이 잘 안 보이는 전시관에 들어선다.
암실로 한 것은 설득력이 있었다. 암실은 의외로 현실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며 그러한 공간에서 돌아다니는 것은 익숙한 경험이 아니다. 즉, AI로 생성 중인 영상과 동일하게 ‘낯섦’을 제공한다. 리움은 전시 제목 ‘리미널’의 의미를 ‘생각지도 못한 무언가가 출현할 수 있는 과도기적 상태’로 서문에 적어 두었다. 그 부분에서 암실은 생각지도 못한 무언가가 등장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끔 하고 조심하게 만든다. 이 부분에서 아쉬운 점이라면, 리움이 미리 ‘전시실이 매우 어두우니 조심하시고 황금색 가면이 돌아다니니 유의해 주세요’라는 말을 했다는 점과 직원들이 플래시를 통해 계속해서 경고를 해준다는 점일 것이다. 사람들이 익숙하지 않은 매체를 사용한 전시라면 더욱이 의도를 명확하게 해서 사유할 지점을 찾을 수 있게 하는 것이 기획자가 할 일이 아니었을까? 관람객은 출현할 무언가를 예고 당했고,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마음먹고 들어가게 된다. 게다가 전시실에 들어가는 길에 현무암으로 된 작품이 있는데 입구를 막지 않기 위해 해당 작품을 지나치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리미널을 작품 외적인 요소에서 느낄 수 있게 장소를 제공했지만, 그에 따를 위험한 상황을 예방하느라 의도를 희석했다. 차라리 예약제로 인원 제한을 하여 보다 넉넉한 전시 공간을 제공하고 안내 사항을 생략했으면 어땠겠냐는 생각이 든다. 또한, 전시장을 휘젓는 황금 가면은 효과적이게 쓰이지 못했다. 암실 속 황금 가면은 시각적으로 존재감이 크지 못했고, 그래서 황금 가면을 쓴 사람의 검은 옷이 함께 보였다. 상호작용을 하는 황금 가면이 아니라, 노동하는 황금 가면으로 인식되었다.
영상의 방식 역시 낯설다. 〈휴먼 마스크(Human Mask)〉를 제외하면 전시에서 보여주는 영상은 모두 편집이 종료된 영상이 아니다. 그리고 이 전시의 영상 작업은 처음과 끝을 알기 힘들다. 대개의 영상 작업의 경우, 영상 시작에 작품명을 올리거나, 영상 끝에 크레딧을 올려 시작과 끝을 구분할 수 있게 하는데, 피에르 위그의 영상은 그런 부분이 없다. 러닝타임이 정해져 있는 〈휴먼 마스크〉도 엔딩 크레딧 없이 짧은 검은 화면으로 영상의 끝을 알린다. 그렇다고 실시간 진행 중인 영상들이 계속해서 다른 장면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영상은 외부의 자극으로 조금씩 변형되지만, 같은 구성이 반복된다. 그리고 대개의 관객은 그 자극으로 바뀌는 영상의 변화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해당 전시를 2주 간격으로 두 번 보았는데, 차이를 체감하지 못했다. 작품의 변화를 조금이나마 체험하기 위해선 전시 오픈 날에서 마지막 날까지의 긴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긴 프로젝트로 보이는 실시간 진행 작업이 정말 실시간으로 변화하면 ‘말 전달하기’ 게임처럼 아예 다른 결과물을 가져와 의미가 퇴색될 것이다. 그러나 전시가 작가 개인의 긴 프로젝트로서 의미가 있다면 한 번 방문한 피에르 위그의 전시는 무슨 의미를 가지게 될까? 관객을 전시 관람객이 아니라 작가의 실험실에 들어간 실험 참여자로 칭하는 게 더 적합한 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피에르 위그는 2010-20년대에 미래적이고 낯선 작품을 만든다. ‘낯섦’을 낯설게 보여주는 방식은 작가의 의도와 일치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관객이 이를 온전히 체험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주지 못했다. 과도기적인 상태가 있었는지도 모른 채 전시장을 떠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