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동하
전시 제목 ‘리미널’은 ‘생각지도 못한 무언가가 출현할 수 있는 과도기적 상태’를 의미한다. 인간과 비인간의 상호 의존성을 어떤 방식으로 인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전시장은 어두웠다. 너무 어두워서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조차 헷갈릴 정도였다. 중심을 잡지 못한 채 휘청이다 마주한 첫 번째 작품은 전시와 같은 제목의 <리미널>이었다. 얼굴 없는 인간 형상이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었다. 얼굴 안에 손을 넣기도 하고, 무언가를 찾는 듯하다가, 그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듯 기어다니며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듯한 몸짓을 반복한다. 이는 ‘형태’가 외부 자극을 통해 스스로를 구성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듯했다.
영상 속 모든 설정은 외부에서 오는 정보를 실시간으로 반영하여 변화한다. 자극을 찾고 배우며 진화하는 인간 ‘형태’의 무언가는 더 이상 인간도 비인간도 아닌 존재가 되어간다. 익숙한 듯 낯선 그 몸짓을 바라보며, 나는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부딪혔다. 인간만이 세계를 인식하고 반응하는 유일한 존재라는 생각은, 이 어두운 공간 안에서 무너졌다.
우리는 대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경계선을 긋는다. 인간과 비인간, 생명과 비생명, 주체와 객체처럼 — 존재를 분류하고 이름 붙이며 규정하려 한다. 하지만 <리미널>은 일상적으로 작동하는 이 이분법적 사고의 한계를 드러낸다. 이곳에는 명확한 경계도, 고정된 정체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형태는 흐르고, 경계는 녹아내린다.
프란츠 카프카가 묘사한 ‘언캐니(uncanny)한 상태’가 떠올랐다. 존재를 이해하는 것은 명확한 분류나 정의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있는 모호하고 애매한 틈을 바라보는 일이라는 생각. 마치 카프카의 『사냥꾼 그라쿠스』에 나오는 인물처럼 — 죽었지만 여전히 세상을 떠도는 사냥꾼은 생과 사, 이 세계와 저 세계 사이를 끝없이 부유한다. 그는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존재와 부재의 경계에 머물러 있다. <리미널> 속 얼굴 없는 인간 형상 또한 그러했다. 명확히 인간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비인간도 아닌 채, 끊임없이 변하고 떠돌았다.
어두운 전시장은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느껴졌다. 공간은 특정한 서사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리와 미묘한 빛, 공기의 흐름과 같은 자극을 끊임없이 던지며, 관객 스스로 감각하고 반응하게 만든다. 이곳에서는 명확한 시작도, 끝도 없다. 어둠 속을 걸으며 마주치는 것들은 고정된 의미를 가지지 않고,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피에르 위그의 이번 전시 <리미널>은 결국 존재를 규정하거나 해석하려는 시도를 무력화시킨다. 대신 우리는, 살아 움직이는 세계의 한 조각으로서, 계속해서 변하고 있는 무언가와 함께 머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