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가현
- ⟪피에르 위그: 리미널⟫
- 리움미술관
- 20250227-0706
‘인간’과 ‘비인간’이라는 말은 어쩐지 분명한 경계를 가진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선조차 인간이 만든 그림자 같기도 하다. 어디서부터를 인간이라 부르고, 어디까지를 비인간이라 해야 할까. 한때 세상은 AI가 곧 인간을 삼켜버릴 것처럼 소란스러웠지만, 그 예언은 금세 희미해졌다. 이제는 인공지능을 친구처럼 대하며 일상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인간과 비인간을 나누던 선이 이토록 부드럽게 허물어질 수 있다는 사실은, 알고 보니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그 흐릿한 경계 속에서 우리는 오래전부터 살아왔다. 말을 하지 않는 인형에게 말을 걸고, 마음을 주고, 때로는 상처받기도 하던 어린 시절처럼. 존재에게 마음을 투사하고, 감정을 부여하는 행위는 늘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인간’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일조차도 인간만의 언어이자 습관이었는지도 모른다. 피에르 위그의 전시 《리미널》은 이 오래된 감각과 질문을 다시 불러낸다.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 짓던 언어들 사이에서, 존재들은 천천히 서로의 얼굴을 닮아간다. 그리고 그 순간, 이름 너머의 세계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들판 위에 한 존재가 있었다. 눈도 코도 입도 없이 텅 빈 얼굴을 가진 여성. 그러나 귀만은 남아 있어 바람 소리쯤은 들을 수 있었을까. 그녀는 절벽 가장자리 선을 따라 걷다가도 허공에 스며들 듯 멈추었고, 곤충처럼 팔과 다리를 휘저으며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처음 태어난 생명이 자기 형체를 인식하려 애쓰는 몸짓처럼, 그 존재는 말없이 스스로를 탐색했다. 그녀의 움직임은 인간과는 조금 다른 리듬을 가졌고, 감정 없이 부유하는 듯했으나, 그 부재조차 낯선 감각으로 다가왔다. 영상은 25분 동안 단 한 장면도 반복되지 않았고,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처럼 계속해서 새로운 장면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기술적 시뮬레이션이기보다는 오히려 한 생명의 흐름처럼 느껴졌다.
조금 떨어진 전시장, 어두운 영상 속 또 다른 존재가 등장한다. 어린 소녀의 가면을 쓴 원숭이. 그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텅 빈 식당 안을 배회하며, 배운 동작을 인형처럼 반복한다. 그러나 때때로 멈춰 서고, 주변을 살핀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혹은 무언가를 느끼는 것처럼. 옆에 놓인 마네키네코는 똑같은 동작을 기계적으로 반복하지만, 원숭이의 몸짓에는 희미한 감정의 흔적이 스며 있다. 반복 속에서 감정이 새어 나오고, 배움과 본능, 기계성과 생명 사이의 선은 서서히 흐려진다. 생물과 무생물, 인간과 비인간이라는 이름은 점점 더 의미를 잃어간다.
작품 속 두 존재는 서로 다른 얼굴을 가졌지만, 묘하게 닮아 있었다. 한쪽은 얼굴을 지우고 인간을 흉내 냈고, 다른 한쪽은 인간의 얼굴을 뒤집어쓴 채 그 부재를 드러냈다. 서로를 비추며, 그들은 인간과 비인간이라는 경계 너머에 또 다른 존재 방식을 제시한다. 그 흐릿한 경계에서, 우리는 익숙했던 질문을 다시 만난다. 인간이란 무엇이고, 어디까지를 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까. 하지만 이제, 그 질문은 말없이 우리 곁에 머물 뿐이다. 이름 없는 존재를 마주하는 일이 인간의 조건이 되는 순간이 오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