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범람의 시대: 유동하는 정체성

소중한

by 마실 MaSill


윤제호 개인전 《이원공명(Resonance of Reality and Virtuality)》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는 매체 특성(media specificity)을 중심으로 하는 모더니즘 미학을 비판하면서, 예술이 더 이상 단일 미디엄의 고유성과 물질성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기술과 구조를 통해 탈매체적으로 전개되는 상태를 ‘포스트-미디엄 조건(post-medium condition)’이라 개념화했다. 디지털 기술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긴밀하게 함께하고 있는 오늘날, 그의 발언은 옅어지기는커녕 짙어졌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미디어 간의 경계가 무너지고, 점차 무수히 많은 기술과 데이터들이 범람하며 중첩되는 포스트 디지털 시대에서 예술은 무엇을 판별하고 생산해 낼 것인가?


윤제호의 개인전 《이원공명(Resonance of Reality and Virtuality)》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미학적 탐색이다. 전시 제목에 쓰인 ‘공명(Resonance)’은 단순한 대비나 병렬이 아닌, 상호작용과 간섭, 파동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이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교차하고 흐르는 유동적 구조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윤제호는 빛과 소리를 주요 매개로 삼아 동시대적 질문을 감각적 장치로 환기하며,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물음을 지속적으로 제기한다.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는 온전히 분리될 수 있는가?”


이원공명(Resonance of Reality and Virtuality)》에서 그는 거울 구조로 설계된 암실 환경 안에 광학 기술과 사운드 매체를 배치함으로써, 물리적 공간 안에 가상적 공간감을 구축한다. 이때 비물질적인 요소들이 감각적 실재로 작동하며 디지털과 물리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교란한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관람자는 신체적으로 개입하고 감각을 통해 조응하며, 중첩되는 시간성과 공간감을 체험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정체성은 고정되지 않고 유동하는 상태로 탐색된다. 그는 이러한 ‘이원공명’의 실천을 통해, ‘공명’이라는 개념을 단순히 기술적·형식적으로 구현하는 것을 넘어서, 다층적인 세계를 인식하고 사유하는 하나의 시각적·감각적 은유로 제시한다.


그의 태도는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문화이론가이자 비평가인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이 진단한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 논리’와 깊은 접점을 형성한다.(1) 전시 내 암실 속 거울과 사운드로 구축된 환경은 고정된 주체나 역사적 심층을 제거한 채, 감각적 표면의 과잉을 통해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흐린다. 이는 제임슨이 포스트모던 공간성에서 지적한, 심리적 내면이나 역사적 깊이를 배제하고 시각적 층위만이 우세한 표면적 공간과 연결된다. 이러한 공간을 경험하는 관람자의 정체성은 고정되지 않고 유동적으로 작동하며, 이는 자본주의 시각 체계 아래에서의 주체 해체와도 맞물린다. 다시 말해, 유동하는 정체성이 곧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과 기술 시스템 속에서 방향을 잃고 부유하는 상태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이를테면, 2018년 한국에서 열린 《빛의 벙커: 클림트》전시는 전통 회화나 조각이 아닌, 현대 기술과 감각의 복합체로 구성된 전형적인 포스트-미디엄 조건(post-medium condition)을 따른 사례였다. 그러나 이 전시에서 미디어 기술은 작품 해석이나 사유를 유도하는 도구가 아니라, 단순한 시각적 몰입 장치로만 기능했다. 결과적으로 예술적 깊이보다는 시청각적 쾌감이 중심이 되었고, 이는 예술이 아닌 기술적 체험 콘텐츠로 소모되었다는 비판을 낳았다. 기술이 단지감각적 자극에 머무를 때, 그것은 자본주의적 형식 유희로 환원되고 만다.


그에 반해 작가 윤제호는 디지털·AI 기반의 첨단 기술을 작업에 도입하면서도, 이를 기술적 향락이나 시각적 완결성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그의 작업에서 빛과 소리는 단지 감각적 자극이 아닌, 질문을 유도하고 사유를 촉발하는 장치이자, 동시대에 범람하는 실재와 가상의 경계를 교차시키는 매개로 기능한다. 그에게 기술은 시각적 몰입에 머무는 수단이 아니라, 감각과 인식의 층위를 교란하고 재구성하는 비평적 도구이자, 관람자와의 관계를 생성하는 실천적 장치로 작동한다.(2) 이를 통해 관람자는 다층적인 현실을 새롭게 감각하고 인식하며 능동적으로 조망하게 된다. 빠르게 유동하는 오늘날의 사회 속에서도, 그의 예술적 실천이 단순한 체험 소비로 휘발되지 않고 지속 가능한 미학적·비판적 당위를 확보할 수 있는 존립 근거가 된다.


다시금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본다. 이토록 우리를 유동적으로 만드는 기술의 범람 속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의 지적처럼 현대성은 분리를 전제로 하지만, 실제 세계는 언제나 혼성과 오염의 상태였는지도 모른다.(3) 그렇다면 이 다층적으로 얽히고 중첩된 세계를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겹겹이 얽힌 현실의 층위를 감각하고, 서로 얽혀있는 요소들 사이의 상호작용과 균열, 그리고 그로 인한 ‘재생산’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그 안에서 서로 울려 퍼지는 관계들에 귀 기울이는 ‘공명(Resonance)’의 실천적 태도일 것이다. 비록 지금 이 순간이 드넓은 태평양 한가운데, 방향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하더라도—그렇기에 더욱, 우리는 다시금 조그마한 뗏목이라도 띄우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연결하고, 감응하고, 사유하는 그 시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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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호 개인전, 이원공명(Resonance of Reality and Virtuality), 설치전경, 서울디자인문화재단 공식 웹사이트)






(1)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단순한 스타일의 변화가 아닌,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에서 나타나는 문화의 총체적 양상으로 파악한다. 이 시기에는 전통적인 깊이(depth)가 사라지고, 표면(image)이 모든 것을 대신한다. 다시 말해, 실재보다 이미지의 이미지, 복제의 복제가 우세해진다.


(2) 이는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가 이야기한 “관계의 틀을 생성하는 예술”이라는 정의와 긴밀히 맞닿는다. 부리오는 예술을 “사회적 교류의 장을 생성하는 방식”으로 보았는데, 《이원공명》은 기술이라는 매개를 통해 가상과 현실, 물질과 비물질 사이의 감각적 긴장을 조성하며, 관람자가 그 안에서 유동적인 정체성을 체험하게 만드는 사회적-심리적 상호작용의 장을 연출한다.


(3) 브루노 라투르 (Bruno Latour),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We Have Never Been Modern,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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