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군의 언어는 소멸한 나의 언어였음을

송은빛

by 마실 MaSill







송은빛1.jpg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 적군의 언어》 2025.9.3-2026.2.1 전시전경, 직접 촬영






공적 질서가 ‘자연’스러움을 체계적으로 잠식해 온 현시점 위에서,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는 낭만적인 미래가 아닌 그저 자연스러운 공간 안에 관람객을 초대한다. 관람객은 전시장을 자유롭게 유영하며 다양한 감각으로 폐허 된 문명을 마주한다. 이곳에서 관람객은 인류의 태생이나 발전 같은 거시 서사를 깨닫는 것이 아니다. 흙, 불, 빛, 온도와 같은 원초적 물질로 이루어진 작품들은 인류의 기원과 발전 같은 연대기적 거대 서사로 환원되지 않고, 자신이 점유한 공간의 물리적 조건과 동시대의 사회 변화를 감각적으로 집중하게 한다. 이 전시는 단순한 개별 작품의 나열에서 벗어난다. 지하층부터 지상 3층까지, 미술관 내에 존재하는 모든 요소들은 미술관에 전시된 오브제로서의 위치를 잃고 관람자로 하여금 커다란 생태계 혹은 예측 불가능한 세상 안에 들어온 듯 개별 작품들은 미술관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를 구성한다. 로하스는 이 총체적인 환경을 통해 일종의 사변적 서사가 있는 공간 안에 관람자를 밀어 넣는다. 만약 당신이 알던 공간이 미래의 세상으로 완전히 바뀐다면, 당신은 무엇을 보고 느낄 것인가, 무엇을 잃었다고 생각할 것인가. 인류 미래에 대한 거창한 거시적 담론이 아니라 익숙한 세계의 붕괴 앞에서 개인이 느끼는 낯섦에서 오는 두려움, 그를 통한 불안감과 허무함처럼 가장 근본적인 감각을 꺼내 올린다. 그의 작업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미래를 재현하는 것을 넘어 관람객이 자신의 감각을 통해 세계를 재인식하게 만드는 조건이 된다. 이번 전시는 미래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예언이 아니라, 현재 우리 시대의 불안과 상실을 남김없이 폭로함에 가깝다.


관람객은 지하에서부터 여정을 시작한다. 지하부터 시작되는 전시는 관람객의 동선이랄 것이 없다. 입구의 벽에는 전시 서문인 듯 보이는 글자의 잔해가 있다. 찢기고 뭉쳐진 전시 서문의 글자들은 인간이 구축한 언어와 질서가 전소해 버린 듯한 느낌을 준다. 안쪽으로 들어서면 강연장이 나타난다. 강연장의 스포트라이트는 무대가 아닌 객석을 향해있다. 하지만 객석은 모두 비닐로 덮여 있어 관람객은 그저 객석의 주변부만 맴돌 뿐이다. 객석을 향해 강하게 비춰지는 스포트라이트는 그곳이 주인공의 자리임을 명확히 하지만, 정작 관람객은 객석에 앉지 못한 채 어둠 속을 배회한다. 이 기묘한 거리감 속에서 관람자는 자신이 이 공간의 주인공이 아님을 직감한다. 관람자는 전시의 관람객으로서 전시장에 입장해 지하층을 지나며 이방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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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 적군의 언어》 2025.9.3-2026.2.1 전시전경, 직접 촬영







이후 지상층으로 향하는 계단은 거대한, 찢어진 천에 덮여있다. 먼지 쌓인 천의 찢긴 틈 사이로 강렬한 햇빛이 들어오는데, 이 공간에 남겨진 관람객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에서 살아남아 폐허 안에 은거하는 생존자가 된다. 어둠 속에 숨어 빛이 들어오는 바깥세상을 경계해야 할 것만 같은 불안함이 전시장 전 층을 오르내리는 동안 지속된다. 그렇게 마주한 1층은 미술관 바닥을 가득 채운 자연이다. 본래 미술관의 주 출입구였던 곳은 흙으로 뒤덮여 완전히 봉쇄되었고 그 위로는 습기 찬 창문 아래 이끼와 작은 풀들이 자라나고 있다. 괴생명체가 생명을 잃고 멈춰있는 흙더미 옆으로 누군가 밟고 지나간 흔적이 선명하지만 관람자는 자신이 저 안으로 들어가도 되는 존재인지 망설이며 흙더미에 곳곳을 탐색하고 익숙한 공간에 들어찬 새로운 생태계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동시에 관람자는 자연스럽게 이 공간과 자신을 분리하며 괴생명체가 모두 죽은 지금, 이 공간 안에서 관람객은 생존자로 전락한다.


다시 계단을 오르면 서늘한 기운과 함께 붉은 조명이 시선을 마비시킨다. 작게 난 구멍 안으로 들어가면 쇠사슬, 레진, 철근과 나무 등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형태가 나타난다. 하늘에서 빛이 쏟아지는 듯한 천장 조명과 그를 극적으로 가린 소나무, 그리고 약간의 서늘한 기온은 관람객이 지금 발을 딛고 있는 공간이 전시장 내부가 아닌 세상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우거진 솔잎 사이로 존재하는 인간의 발전이 낳은 잔해는 인류 멸망 이후에도 여전히 자연 생태계는 존재하며 무성해지지만 인간이 만들어낸 생태계는 멈춰있고 부식되었으며 엉켜버림을 보여준다. 이 거대한 형체는 전시장 정 중앙에 매달려있다. 하늘에 달린 외계 생명체로 느껴짐과 동시에 형체에 가까이 다가선 관람객은 생명력이 전혀 없음을 인지하고, 인류가 만들어낸 산업 문명의 찌꺼기 정도로 받아들인다. 관람객은 이 형체의 사이를 지나다니며 녹은 비닐, 부식된 철근과 쇠사슬, 뭉친 아스팔트 덩어리를 보며 자신이 혹은 우리가 사용하고 버린 것들의 잔해를 마주하고 서늘하게 식은 거대한 찌꺼기를 보며 인류가 존재하지 않는 시간에 대한 공허와 허무를 온몸으로 감각한다.


마지막 3층으로 오르는 도중, 관람객은 아래층과는 완전히 다름을 생생하게 느낀다. 강렬한 파란빛 조명에 계단을 오르면 땀이 날 정도로 더운 공기. 아래층과 동일한 작은 구멍을 통해 전시장을 볼 수 있는데, 그 구멍은 아크릴 판으로 막혀 인간의 출입이 완전히 배제된 공간이다. 그 안은 포토샵에서 ‘아무것도 없음’을 나타내는 빈 레이어의 표현, 격자무늬의 벽과 바닥이 있고 격자무늬가 없는 바닥 한 부분에 타오르는 불이 있다. 물을 표상하는 파란 조명과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피어오른 불은 자연적인 요소 그 자체로 다가오며 인류 문명이 과열되기 이전의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지구 초기의 상태 혹은 인류 문명의 초기화 후 다시 시작되는 세계를 암시한다. 2층의 빨간 조명과 서늘한 기온, 3층의 파란 조명과 더운 공기는 관념을 비틀며 관람객에게 변화한 세상에 대한 친절한 힌트를 건넨다. 비로소 관람객은 전시장 전층을 오르며 관람객에서 관찰자가 된다.


관람객을 동선 안에 가두지 않는 형태의 전시 구성은 되려 하나의 큰 흐름으로 이어졌다. 인간의 질서와 언어가 파괴된 지하층에서 시작된 여정은, 문명의 패배로 나타난 1층의 폐허를 거쳐 차갑게 식어버린 인류의 잔해를 마주하는 2층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의 접근이 통제된 3층에서 관람객은 인류 이후의 새로운 시작을 은유하는 풍경을 마주하며 관람객은 폐허 된 세상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님을 인지하고 전시장을 떠나게 된다. 마치 하나의 공연을 보는 것과 같은 이야기의 흐름이 분명하게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관람객의 지위는 끊임없이 전이하게 된다. 지하층에서는 문명의 붕괴를 실시간으로 겪는 생존자로서 존재하지만 1층에서는 자연에게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을 내어준 낯선 세계의 이방인으로 재정의 된다. 2층에서는 인류의 허무한 결과물을 말없이 바라보는 목격자가 되고 마침내 3층에서는 인류 이후의 새로운 세계의 탄생 가능성 앞에 완전히 단절된 관찰자로 끝맺는다.


이번 전시 《적군의 언어》는 1995년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렸던 첫 전시인 《싹》의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당시 《싹》이 멸균된 화이트 큐브를 벗어나 사람이 사는 공간으로 미술을 끌어들여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30년이 흐른 지금, 로하스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꺼냈다. 사람이 사는 공간에서 사람의 흔적을 지우고자 하며 폐허가 된 미술관을 통해 그 안에 살아왔던 인간의 행방에 대해 궁금하게 한다. 계획적인 이번 전시의 설계는 고도화된 현대의 행태를 원시적인 요소를 통해 보여주며 관람객을 인간 이후의 시간으로 데려가 깊은 허망함을 마주하게 한다. 전시 전반에서 세계가 스스로 작용해 현실을 만들고 그 현실이 다시 물질을 창조해냄(1)을 이야기하며 인간도 스스로 작용했을 뿐임을 보여준다. 결국 작가는 아포칼립스는 세계의 물리적 종말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의 형식이라는 믿음이 끝나는 인간 중심적 세계관의 종말을 말한다. 적군의 언어는 외계 언어나 외부 침략자의 목소리가 아닌, 소멸한 나(인간)의 침묵 끝에 들려오는 언어이며, 관람객이 알고 있던 모든 것의 변이를 통해 소멸해 버린 인간의 빈자리를 각인시킨다. 인간 중심적 세계관의 종말 이후 소멸한 나의 언어가 끝난 자리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세계의 언어는 인간이 남긴 흔적이자 나의 언어이다.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

2025. 9. 3. – 2026. 2. 1.

아트선재센터








(1) 아트선재센터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인터뷰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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