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오컬트는 대개 비이성적이며 음지적인 활동 중 하나로 여겨지지만, 오히려 오컬트야말로 가장 인간의 의식에 닿아있는 활동이 아닐까 싶다. 사실 설명 불가한, 비현실적인, 기적적인 ‘그것’들을 어떻게든 언어로 만들어내려는 -이성 너머의 불가지한 존재를 현실로 끄집어내고자 하는- 길고 오만한 역사가 이미 있었다. (전시의 서두가 신으로부터 시작된 이유도 여기에 있을까? 사실상 오컬트의 그러한 시도는 신에 대한 도전이라고도 볼 수 있으니) 하지만 과거와 달리 ‘그것’은 단순히 유령, 마녀, 영혼 따위의 오락거리가 아니게 되었다. 다시 말해, 이제 그것들은 ‘이름’을 가진다. 우리가 그것을 만들고, 만들었고, 만들어내고 있음을 안다. 강령은 초자연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아주 계획적으로, 의식적으로 행해지는 활동이다.
‘이름’은 인식과 책임을 의미한다. 과거의 유령이 익명의 공포였다면, 현대의 이름을 가진 ‘그것’들은 인간의 욕망, 미디어, 시스템이 만들어낸 집단적 부산물이다. 우리는 이제 그것들이 마주해야 할 새로운 주체임을 안다. 전시가 점차 진행될수록 개인의 두려움이나 괴담에서 어떤 비극적인 문화, 사회적 트라우마로 진행되는 방향성이 바로 이러한 집단적 명명의 과정이다. 명명 命名은 치유의 효과가 있다. 이것은 곧 앎과 경험으로 포착되지 않는 결여 그 자체인 실재계를 통제해 상징계로 편입시키려는 지성체의 필사적인 행위이다. 실제로 외부 세계에 질서를 부여한 것도 아니다. 세계가 그 질서에 따라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그저 현상에 가시적인 이름표를 붙여 ‘통제되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매우 허구적이나 인간에게는 필수적인 질서다. 즉, 강령은 언어와 매체를 동원해 억지로 실재를 소환하려는 상징계의 기술인 셈이다. 이러한 의식적, 계획적 행위는 주체의 안정을 위한 필수적인 문화적 작업이다.
하지만 이러한 오컬트적 실천은 단순히 치유나 종결의 과정이 아니다. 망각하면 그만이지만 굳이 붙잡아 이름을 붙이는 인간의 필연적인 행위를 보여주는 고도의 문화적 기술이다. 우리는 명명을 통해 실재계의 무질서를 억지로 상징계의 질서로 편입시키려 한다. 그러나 카프카의 오드라데크가 보여주듯, 그 근심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책임의 대상이 되어 삶 속에 영구적으로 자리 잡는다. 이 명명된 근심은 우리 사회의 집단적 트라우마나 시스템의 모순이다. 그들은 언제든 상징계를 파열시킬 수 있다. 따라서 강령이라는 의식은 완벽한 해결책을 찾는 행위가 아니라, 이 파열 앞에서 취약한 질서를 불안정하게나마 유지하려는 필사적인 시도로 기능한다. 이는 망각에 대한 거부다. 고통스러운 경험을 반복해서 소환하고 이야기함으로써 주체의 안정을 위한 방어 기술이자 문화적 의식이다. 궁극적으로 이번 전시는 근심을 제거하는 기술이 아닌, 근심을 명명하고 유지하는 기술을 제시한다. 근심과 트라우마 없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 없는 현대인에게 강령은 자신을 구성하는 요소를 끊임없이 마주하고 포용하는 필연적인 문화적 활동이며, 《강령: 영혼의 기술》은 우리 모두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현대의 강령 의식 속에 참여하고 있음을 선언하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지성적인 기록이다.
《강령: 영혼의 기술》
제13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2025.08.26. – 2025.11.23.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