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번째쯤 다시 본 <미생>
우리는 희망을 품는다. 내 수가 네 수를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고. 어마무지하게 통쾌할 거라고. 어마무지하게 박수를 받을 거라고. 네 실패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고, 내 성공엔 다 그럴듯한 성공신화가 첨가돼 있다고. 그렇게 우리는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각한다. 그리고 무너진다.
장그래는 희망을 품는다. 고졸에 낙하산 계약직이지만, 일 잘하고 사람들이 이뻐라 하니까. 그러니까 정직원이 될지도 모른다고. 그러면 우리 오차장님이 좋아할 거라고. 천과장님이 좋아할 거라고. 김대리님이 좋아할 거라고. 엄마가 좋아할 거라고. 고졸 정규직 전환은 유례가 없단들, 이번엔 다를지 모른다고. 그리고 자각한다.
사람들은 장그래를 동정한다. 너무 고마운데 너무 꼴배기가 싫다. 다 좋고 맞는 말인데, 시팔 말만 하지 말고 뭐라도 해주던가. 그럴 때면,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이면 ‘턱’하니 찾아오는 타격감 같은 게 필요하다. 그럴 때면 불경이고 성경이고 나발이고. 내 현재가 당신의 과거인 선배의 꾸밈없는 고백만이 가슴을 ’턱‘하니 쳐준다. 오차장은 그런 사람이다. 장그래는 무너지지 않는다.
정규직이 될지도 모른다는, 장그래의 희망이 기어코 똥을 싸버린다. 정규직은 개뿔 팀이 위기로 몰리고 회사가 위기로 몰린다. 똥이란, 자고로 누가 쌌건 누군가는 치워야 한다. 그 누군가를 자처하는 오차장이 회사를 나가며 모든 책임을 떠안는다. '잘못된 선택. 밀려드는 후회. 돌이킬 수 없는 과거. 안타까운 현실' 고개를 숙이는 것 외에는 어찌할 방도가 없는 장그래에 오차장이 작별인사를 한다.
“안될 거 같더라도 끝은 봐. 살다보면은 끝을 알지만 시작하는 것도 많아”
어울리고 싶고, 녹아들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머지않아 그럴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자각했던 때. 그렇게 운전하다 교통사고라도 났음 딱 좋겠다 싶었던 때. 옥상서 담배 피다 미사일이라도 떨어졌음 딱 좋겠다 싶었던 때. 누워 천장을 보다 천장이 무너져 내렸음 딱 좋겠다 싶었던 때. 그럴 때면, 이 말을 중얼거려본다. 궁시렁대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읊어본다. 그러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아,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상사던 고객이던 믿었던 이던 회의던 미팅이던 술자리던 뭐던. 오늘도 깨지고 내일도 깨지고 모레도 깨진다. 스물에도 깨지고 서른에도 깨지고 환갑에도 깨진다. 그럴 때마다 중얼거리다 궁시렁대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읊어본다. 그럴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아, 이게 뭐 하는 짓인가’ 그리고.
어우 지겨워. 몇 번째야. 또. 또? 그러게. 그러네. 별일 아니네.
그러다 다른 표정을 지어본다. 바지에 똥을 지려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이처럼 불안해하다, 허기진 표정을 지어본다. 허기진 표정으로 안될 거 같은 일의 결말을 맞이하고 결과를 받아들인다. 또 다른 안될 거 같은 일을 시작하고 끝을 본다. 매번 아프고 지려버릴 거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중얼거리다 궁시렁대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읊다 보면 별일 아님을 자각한다. 이번엔 조금 덜 무너진다. 다음엔 그보다 덜 무너진다. 다시 한번 희망을 품어본다. 이러다 보면 무너지지 않을 거 같다. 그리고 자각한다. 그리고 무너지지 않는다.
오차장의 첨언대로 버텨라. 그리고 이겨라.
P.S. 장그래와 오차장
https://youtu.be/CfQ-A0gzsno?si=22U25kQoDCJ1-AFk
*아트인사이트에 기고한 글입니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69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