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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제경 Mar 28. 2024

좋을 때다

영화 <집으로…>(2002)


좋을 때다. 라는 말이 절망스럽다.

뭐 그렇게 나쁜 건 아닌데, 그렇다고 뭐 그렇게 좋지도 않은데. 이 애매모호함이 가장 좋을 때라니. 앞으로는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좋을 때다. 라는 말이 고백인지 위선인지 판별해야만 되겠다. 그러다 <집으로…>를 다시 봤다.


초등학생 때였을 거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나른한 교실. 투박히 생긴 선생님이 투박히 생긴 USB를 꺼내고 친구들이 환호를 지른다. 오늘은 선생님이 소중히 불법 다운로드해 주신 영화를 보는 날이다. 곰플레이어 재생 버튼이 눌리고 영화가 시작된다. <집으로…>도 그렇게 시작됐다. 그로부터 시간이 아주아주 많이 지나 그때 그 선생님이 정년퇴임하셨으려나라는 생각이 드는 지금까지 선명히 남아있는 기억 하나는. 그러니까 편식은 정말 구리다는 거다. 병중에 체감한 백숙의 효능을 복기해 볼수록 더욱 그렇다. 그런데 20여 년이 지나 다시 본 똑같은 영화가, 좀 아프다.


올해로 각각 7살과 77살이지만 서로 생면부지인 상우(유승호)와 (외)할머니(故 김을분). 둘은 ‘어른의 사정’에 의해 상봉과 동거를 동시에 시작한다. 할머니는 말을 못하고, 그런 할머니를 상우는 병신이라 부른다. 할머니는 촌스럽지만 가장 귀한 것을 내주고, 상우는 촌스럽다 투덜댄다. 그런 상우를 보고 있자면 ‘어린 노무 쉐키‘가 나올 법하지만 그 생각이 오래가진 않는다. 우리 모두 그랬던 적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투덜대는 어린 마음도 이해가 되고, 촌스러운 늙은 마음도 이해가 된다.


그러니까 상우의 7살은 일종의 ‘까방권’인 셈이다. <집으로…>는 어린 시절과 그때 외할머니와의 시간을 자연스레 오버랩시킨다. 할머니에 구렛나룻을 맡긴 상우가, 내가 바가지머리에 오열하는 장면이나.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을 기대했던 상우가, 내가 물에 빠진 닭을 보고 오열하는 장면이라던가. 그때는 분명 일생일대의 사건이었는데, 지금 보니 그렇게 별일 아닌 것들이다. 그런 상우를 보고 있자면, 좋을 때다. 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언제 철드나 싶던 상우가 할머니를 점차 이해하고, 애틋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상우의 좋을 때가 끝난다.


엄마로부터 편지가 날아오고, 상우는 고대했던 집으로 돌아가게 됐다. 둘의 지겹던 밤이 마지막 밤이 된다. 좋을 때임을 알았을 때, 좋을 때가 끝난다. 소중한 것으로부터 헤어져야 할 순간은 언제나 기습이다. 역으로 상우가 할머니에 유치하지만 가장 귀한 것을 내주지만, 할머니는 무덤덤히 받지만. 그 두 뒷모습이, 나는 좀 아프다.


영화는 끝났지만, 잠시 인터미션을 가져본다. 그러니까 애시당초 좋을 때. 라는 건 자각하지 못할 때. 좋을 때. 인 모양이다. 돌이켜보면 <집으로…>를 처음 처음 봤던 초등학생 때도. 2차 성징이 어른이 된 듯한 우쭐함으로 느껴지던 중학생 때도. 야자 째고 먹는 당구장 짜장면 맛을 알게 된 고등학생 때도. 염원하던 20살 새내기가 됐을 때도. 뭐 그렇게 나쁜 건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뭐 그렇게 좋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금 와서 뒤돌아보니 좋을 때다. 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아무래도 지금, 좋을 때. 인 거 같다.

할머니도 상우도 나도 너도 좋을 때. 인 거 같다.  


*아트인사이트에 기고한 글입니다.

https://www.artinsight.co.kr/m/page/view.php?no=69362#link_guide_netfu_64709_77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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