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터널 선샤인>(2004)
잘못은 대개 쌍방이다.
네가 잘못했네. 내가 잘못했네. 그러니까 왜 그래서. 그러게 누가 그러래. 분기별로 한 번씩은 누군가와 크게 싸운다. 되돌아가면 달아나고 달아나면 되돌아온다.
한순간의 통쾌함이 수천 시간을 괴롭게 한다. 수많은 이들이 수많은 영화를 보고, 수많은 노래를 들으며 수천 시간으로부터 벗어난다. 약발이 떨어짐 다시 보고 듣는다. 구구절절한 발라드와 슬픈 영화, 욕설 가득한 힙합과 정의구현 영화는 그래서 시종일관 잘 팔린다.
올해 1분기는 조용히 넘어가나 했는데, 또 싸웠다.
그럴 때마다 <이터널 선샤인>을 찾는다. 내가 뱉은 말과 네가 삼킨 말을 다시 삼키고 뱉을 수 있다면. 그게 될 리가 없으니 그게 되는 영화나 찾는다.
지지고 볶고, 물고 빨고, 얼씨구 절씨구에서 지져버리고 볶아버리고, 깨물고 할퀴고, 어쩌네 저쩌네가 진절머리 난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수술을 통해 기억을 삭제한다. 수술은 후자를 삭제하기 위함이지만, 전자의 기억까지 삭제해버린다. 둘은 그렇게 연인에서 타인이 된다.
타인이 되니 대부분의 불만이 해소된다. 무례했던 말이 다시 정중해지고, 치사했던 행동이 다시 근사해지고, 유치했던 헛짓거리가 다시 즐거워진다. 많은 걸 나눈 만큼 뚜렷이 나눠졌던 게 무엇인지는 알 바 아니고 다시 많은 걸 나눌 생각에 들뜬다. 그런데 그(녀)가 기억이 안 난다.
수술에 실패한 수많은 이들은 화내고 울다 체념하다 뒷담화를 시작한다. 그러다 <이터널 선샤인>을 다시 본다. 그리곤 수술에 성공한 조엘과 클레멘타인을 부러워한다. 마지막 시퀀스 전까진 말이다.
서로가 서로의 기억을 지웠음을 알게 된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서로의 뒷담화가 녹음된 카세트 테이프를 듣게 된다. 조엘은 클레멘타인이 무식하다며 헐뜯고, 클레멘타인은 조엘이 지루하다며 헐뜯는다.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못 듣겠는지 술이나 빨자던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잠시 멈춰 선다. 그러곤 얼탱이가 없는 짧은 대사를 주고받는다.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을 찾을 수 없어요”
“보일 거예요. 곧 거슬리게 될 테고 난 지루하고 답답해하겠죠. 나랑 있으면 그렇게 돼요“
”Okay(괜찮아요)“
”Okay(괜찮아요)“
그래, 저런 수술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던 수많은 이들이 좋다 만다. 이 정도 상상력은 나도 수천 번은 반복했다고! 그게 수많은 이들을 미치게 하고, <이터널 선샤인>에 미치게 한다. 이 단순한 한마디를 들으려면 수술 정도는 해야 된다는 거야? 찰리 카우프만은(각본) 이렇게 말한다. 나라고 뭐 별 수 있겠냐고요.
정말 기억을 삭제하는 수술이 있다 한들, 별 수 있을까. 내가 널 이만큼 위해주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이야. 너는 말을 그따구로 밖에 못하니. 다시 한번 되돌아가면 달아날 것이고, 달아나면 되돌아올 것이다. 그러곤 해피엔딩에 도달한 <이터널 선샤인>을 다시 한번 찾을 것이다.
내가 <이터널 선샤인>을 다시 찾았을 때, 너도 <이터널 선샤인>을 다시 찾았으면 좋겠다. 그러곤 “Okay”라 말해준다면 좋겠다. 그러면 나도 ”Okay”라 말할 텐데. 그렇게 달아나도 되돌아오고 되돌아와도 달아났으면 좋겠다.
*아트인사이트에 기고한 글입니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69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