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 속에는 미쳐 빠져나가지 못한 희망만이 남아있었다.
나는 우울할 때면 옷장을 정리한다. 지난 1년 동안 입지 않았던 옷은 과감하게 버린다. 미련하게 갖고 있어도 다시는 입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정리를 반복하다 보면 더 버릴 옷이 없을 것 같지만, 신기하게도 매번 한 무더기의 옷을 버리게 된다. 이렇게 많은 옷 중에 내가 입을 옷은 없다는 게 새삼스레 신기하기만 하다. 그래도 한차례 옷을 버리고 나면 또 새로운 옷을 옷장에 채워 넣을 수 있다. 내 기분도 그와 마찬가지다. 감정을 숨기기보다는 아픈 감정을 되새겨보고 마주하다 보면 어느새 우울한 감정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감정을 마주할 수가 있다.
바깥 생활하는 것을 좋아하는 내가 코로나로 인해 집에 머물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많아졌다. 코로나 블루가 내게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는 동안 나는 집안 곳곳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마지막으로 남은 게 편지 상자였다. 나는 여태껏 받았던 편지를 버린 적이 없다. 이미 지나간 연인들이 내게 준 편지도 보관하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심지어는 고등학교 때 나를 짝사랑했던 한 남학생이 준 편지도 보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편지 상자는 마치 열어서는 안 될 판도라의 상자다. 어떤 흑역사가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용기 내어 침대 밑에 넣어두었던 상자를 꺼내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오래된 편지 속에는 그 당시 유행하던 음악, 영화, 혹은 잊어버린 기억들이 담겨있었다. 그래서 나는 한참 동안 그 추억에 빠져나오지 못하고 꼬박 하루를 편지 읽는데 몰두했다. 전 남자 친구와 연관된 흑역사가 튀어나올 때면 깜짝 놀라 편지를 찢곤 하면서. 잊었던 기억들은 내게 즐거움, 그리움, 민망함 등 다양한 감정을 상기시켜주었다. 철없었던 내 모습들이 부끄러웠다. 그렇지만 그런 과정들을 거쳤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앞으로도 내게 수없이 많은 흑역사가 생기겠지만 그때마다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편지 상자에도 나의 희망은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