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하반기 회고: 서른 즈음에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by 파이

이전 회고로 부터 정신 없이 반 년의 시간이 흘렀다.

아니, 정신을 빼 놓고 살았다는 표현이 좀 더 적절할 것 같다.

나아지지 않기로 결심한 그간의 반년은 어땠을까?




1. 서른 즈음에


지루한 시간 이라고 생각했다.

예전 처럼 많은 도전을 하거나 변화가 있지 않았으니까.

의외로 헤아려본 반 년은 생각보다 꽉 차 있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주도적으로 시작하고 작은 행사도 진행한 일.

이전부터 미루던 프로젝트를 진행한 일.

서울 살이 6년 반 만에 처음으로 해외여행도 다녀왔다.

지루하다고 치부하기엔 꽤 밀도 높은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왜 지루하다고 느꼈을까.

단순히 기억력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 이유를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가장 먼저 닿은 답은 나의 상태였다.

세상이 회백색으로 보였기에 모든 것이 지루하게 느껴졌다는 것.

가장 타당한 이유였지만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호전된 내 모습이 도저히 상상되지 않아서, 다른 이유를 찾아야만 조금이라도 희망을 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이제 서른이 넘은 나이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면 몸이 노쇠해져 영양제와 약을 챙겨 먹듯,

나도 이제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 웬만한 일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된 게 아닐까.

서른이라는 나이에 이런 소리를 하면 누군가는 코웃음을 치겠지만

일찍 허리가 아프거나 탈모가 오듯 감정의 노화도 남들보다 빨리 찾아올 수 있는 법이다.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이는 게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미 희미해진 '정상적인 생활'을 억지로 꿈꾸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았다.


왜 나는 이전 처럼 낫고싶어 했을까?

가장 살이 많이 빠진 순간이라서?

운동, 공부, 미라클 모닝까지 소위 갓생이라는 삶을 살았던 순간이라서?

혹은 상태가 나빠지기 전 마지막 모습이라서?

회복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리다 보니, 그 동안 낫고 싶다는 이유로 매일 공부, 운동에 , 여러 목표에 매달렸던 내가 바보 같아 보였다.

마치 지나간 젊음을 되돌릴 수 있다고 믿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내가 그토록 과거의 상태를 갈망했던 이유는

아마 내가 그 시절에 두고 온 수많은 잘못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는 안다

내가 엄청난 죽을죄를 지은 건 아니라는 것을.

다만 나는 잘못을 크게 부풀려 기억하고, 그 조각들을 죄책감으로 빚어 머릿속에 영원히 저장해두는 사람이라는 것도 안다.

집을 나온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차곡차곡 쌓인 잘못과 죄책감들.

그것들을 완전히 정리 하는 것만이 내가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어왔던 것은 아닐까.


https://www.youtube.com/watch?v=L7lED8RtdAI





2.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과거의 잘못은 되돌릴 수 없다.

비슷한 행동으로 대신하거나 용서를 구할 수는 있을지라도, 이미 일어난 일을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다

그러니 나도 어떤 방식으로든 용서받기 위해 노력은 하겠지만,

잘못 자체를 돌려놓으려다 나 자신을 고문하는 일만큼은 이제 그만하고 싶다.


이제는 과거에 두고 가야 할 것들을 기꺼이 놓아주려 한다.

더 이상 예전처럼 바로잡으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것들 말이다.

중요하지 않은 관계는 흐릿해지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

꼭 해야 하지 않아도 될 일의 우선순위를 낮추는 것.

그럼에도 남겨진 책임 만큼은 내 손으로 끝까지 지키는 것.

나아갈 방향을 다시 찾는 것.


이번 회고를 통해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

송년회, 신년회 같은 어떠한 행사 속에서는 알 수 없었던 나의 한 해에 대해 솔직하게 돌아볼 수 있었다.

나는 아픈 상처는 잊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매달리면서도, 나에 대한 긍정적인 면들은 단 하나도 기억하려 하지 않았다

겸손해야 한다는 강박에 좋은 점들을 외면했고, 그 태도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채도를 낮추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는 조금 더 좋은 기억들을 남겨두려 한다.

부정적인 감정은 힘든 파도처럼 밀려오지만, 좋은 순간들은 바위에 억지로 새겨야 겨우 흔적이 남으니까.

억지로라도 좋은 부분들을 기록하고 느껴보려 노력해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2026년에는 좋았던 일을 기록하는 것을 목표로 삼으려 한다.

거창하지 않아도 좋다.

잘한 일 3가지 이상을 글이나 다른 방식으로 남기는 것.

형식이나 양에 얽매이지 않고 꾸준히 기록해 보는 것이 나의 새해 목표다.

내가 아끼는 것들, 사람들과 보낸 시간까지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

이젠 그런 시간을 살아내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https://www.youtube.com/watch?v=YFGDCobBgk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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