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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진 May 20. 2023

삶이라는 숭고한 시간

컨택트(arrival, 2014)


때로는 가볍게 시작한 영화가 인생의 나머지를 바꿔놓기도 한다. 수능이 끝난 후 북적이는 교실에서 아이패드에 있던 영화를 ’그냥‘보기 시작했다. 2시간이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봤던 이 영화는 5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내겐 강렬한 체험으로 남아있다. 영화가 끝날 쯤엔 다른 사람들이 있건말건 자제없이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힘들었던 시간을 보상받는 듯한 위로와 초월적인 개념은 내겐 감당할 수 없을만큼 대단하면서도 평생을 느끼고 있을만큼 당연한것이기도 했다.


컨택트의 원작 소설은 story of your life(네 인생의 이야기)로 sf소설의 제목치고는 매우 따뜻한 느낌이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영화를 다 본 후엔 제목의 의미가 따뜻하게 다가올 것이다. 영화의 원제는 arrival로 좀 더 외계인과의 접촉에 초첨을 맞춘 듯 하다.


어느 날 갑자기 지구에 착륙한 12개의 우주선과 그 안의 헵타포트들. 다리가 7개인 문어도 오징어도ㅠ아닌 외계생명체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각지에선 외계인들의 언어를 해석하기 위한 전문가들을 파견한다. —(에이미 아담스)도 그 중 한명으로 언어학자다. 외계인과 소통하기 위해 그 언어를 연구하면서 점점 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고 자신의 시간과 삶까지 이해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보통 외계인이 나오는 소재는 맨인블랙, 우주전쟁 처럼 친구 혹은 적으로 나오기 마련이다. 미지의 생물은 우리에게 두려움의 존재기도 하고 친해지고 싶은 새로운 것이기도 하니까.


반면 컨택트에서 그려지는 외계인의 목적은 인간과 비슷한 고등생물이라면 당연히 가질법한 목적을 지닌다. 언어를 전파하고 그들의 사고방식을 전파하는 것. 인간역시 종교나 언어, 문화 등을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나라에 전파하려하지 않은가. 컨택트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미지의 존재라고해서 단순하게만 그려졌던 외계생물을 매우 설득력있고 이해가 가능한 생물로 그려냈다. 이런 행동은 각 나라에 선교사들을 보내는 종교인들의 숭고한 모습과도 비슷하게 보인다.


언어체계에 나타나는 시간


언어는 인간의 지능이 발달하게 된 주요한 요인으로 뽑힌다. 그렇다면 언어의 구조가 한 생명체의 사고방식과도 연관되지 않았을까. 이런 개념은 영화에서 에이미 아담스가 그들의 언어를 습득함으로서 얻게 되는 개념과 일맥상통해있다.


헵타포트의 언어는 원형으로 이루어져 있어 앞뒤와 좌우 구분이 가지 않는다. 일직선으로 놓여진 인간은 시간을 일직선상으로 생각한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고 생각하고 각 시간은 한 글자처럼 순간, 즉 ‘찰나’의 시간으로 생각하게 된다.직선상의 문자체계를 가진 우리에게 시작과 끝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인간을 정의하는 그 자체와도 같다.


반면 헵타포트들은 원형의 언어를 씀으로 그들의 시간 개념이 많이 다르다. 시작과 끝이 구분이 되어있지 않으니 시간에 역시 시작과 끝을 구분하지 않는다. 생명체라면 모두 겪을 탄생과 죽음을 시작과 끝이라고 규정짓지 않는 것이다. 그들에게 시간은 하나로 이어진 원처럼 영원히 돌고 돌아 반복되는 것이다. 탄생은 또다른 죽음이고 죽음이 또 탄생이 되는 것처럼. 이들에게 한 순간은 ‘찰나’가 아닌 ‘영원’이다. 원 속의 점처럼 사라지지 않고 끝나지도 않은채 계속 존재하기 때문이다.


생명이라면 느낄 죽음에 대한 슬픔이나 이런 것들은 헵타포트들에겐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시간의 한 점에 불과하다. 죽음이 끝이 아니고 탄생이 시작이 아닌 시간관념은 우리가 살아오며 성립했던 시간개념을 빗겨나가지만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동양의 노자 사상에서처럼 인간은 하나의 자연임을 명시할 때와 비슷하며, 칼 세이건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별에서 온 자식으로 죽어도 원자상태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과도 비슷하다.아이러니하게도 원자도 별도 우리는 모두 원형으로 나타낸다.



일직선상의 시간 과거-현재-미래


다시 인간의 시간 개념으로 돌아와 보자. 일직선상에 놓인 시간은 과거를 만들고 현재를 살게하며 미래를 기대하게 한다. 영화 초반에 루이스의 모습은 오로지 현재만을 사는 사람인 것 같다. 과거가 어땠는지 무엇을 기대하며 사는지 전혀 나오지 않고 그런 조짐도 내비치지 않는다. 그저 있는 삶을 살아가지만 살아가기만 할 뿐이었다. 과거의 미련도 미래의 기대도 없는 그녀는 이미 인간보다는 헵타포트와 더 가까워 보인다.


영화는 플래시백을 통한 트릭을 이용한다. 영화 내내 루이스는 딸과의 추억을 드문드문 떠올리며 괴로워 한다. 대부분 과거 루이스가 딸을 잃었고 그로인해 이런 재미없는 삶을 사는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안(제레미 레너)가 나오고 플래시백이 더 진행되면서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다. 두 사람이 아이의 부모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두사람은 이미 예전에 결혼했던 사이인가?그런 것 치고는 매우 건조하다. 영화의 후반부가 되어서야 그간의 장면들이 모두 루이스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미래의 시간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헵타포트의 언어를 이해하면서 그들의 사고방식과 시간을 이해하게 되고 미래 시간을 습득한 것이다.


언어를 습득하듯이 루이스는 시간을 습득한다. 이로인해 모든 것이 설득력을 가진다. 헵타포트들이 지구에 온 것은 어떤 목적이나 이유보다도 그런 일이 일어나는게 미래에 일어날테니 온 것이었다. 일어나야하는 일. 어찌보면 운명론적인 이야기다.


루이스의 미래는 계속해서 루이스의 머릿속으로 들어온 것처럼 과거이기도 하고 현재이기도 하다. 헵타포트의 언어를 습득한 루이스에겐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개념은 소용없다. 과거의 일이 이미 일어난 것이라면 미래는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암울한 운명론으로 볼 수도 있지만 초월적인 신이나 자연의 개념으로도 볼 수 있다.


장자는 자신의 아내가 죽었을 때 슬퍼하지 않았다고 한다. 죽음은 그저 캐어났던 흙으로 돌아가는 것 뿐이므로 슬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이별을 겪었거나 상실을 겪은 사람에게 위로를 준다.


루이스는 자신과 이안 사이에서 딸이 태어남을 알고  또 병으로 죽을 것도 안다. 그로인해 이안과 싸우고 헤어짐까지. 신의 존재에 가장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루이스는 어떤 변화도 추구하지 않는다. 이안과 사랑을 하지 않을 수 있지만 사랑을 하고 아이를 가지지 않을 수 있지만 아이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다. 그녀에게 미래는 과거와 일맥상통한 것이기 때문이다.


운명론 속의 숭고한 희생


루이스는 미래를 알지만 사랑을 하고 이별을 겪는다. 헤어질 걸 할면서도 이안을 사랑하고 죽을 걸 알면서도 딸을 낳는다.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운명같은 것이 아니다. 모든 걸 알면서도 감정을 가지기로 선택한 인간성과 사랑에 대한 것이다. 미래에 대해 안다는 건 곧 그 감정역시 전해짐과 같다. 루이스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을 딸을 사랑하고 있고 이제 막 감정이 싹트려는 이안도 사랑한다. 멀리 일어날 이별에 대해 미리 아파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별도 시작도 당연한 것이니 지금의 감정에 충실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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