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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꺼꿀이 Feb 06. 2022

술 못 먹는 사람이 감히 해보는 술 이야기

나도 술 잘마시고 싶다…

 우리 아빠는 술을 참 좋아했다. 장난삼아 술과 딸 중에 고르라고 하면, 눈을 지그시 감고 난처해 하던 우리 아빠… 토끼같은 딸 둘을 낳고도 꾸준히 술자리를 다니면서 만취하는 것을 즐겼던 걸 보면 우리 아빠는 술을 마셔야 해서 마신 사람이 아니라, 정말 좋아해서 마신 사람이다. 그런 아빠는 어렸을 때 항상 우리 자매의 손을 잡으며, 너네가 얼른 커서 아빠와 술을 마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런 아빠의 기대는 수능 끝난 날 시험삼아 마셔본 KGB(도수가 낮은 레몬맛 나는 술)에 얼굴이 새빨개진 채 만취한 작은 딸이 보기 좋게 다 깨부셨다.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술을 좋아한다.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 중 약 70%가 술을 좋아하고 잘 마신다. 이건 아마 내가 맨정신으로도 손쉽게 유사 과음 상태가 되기 때문에,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친해져서 일수도 있다. 뭐 어쨌든 주변에 술 잘 마시는 사람이 많다보니, 나는 정말 상대적으로 더 술을 못 마셔보인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쓸데없는 자괴감을 느낀다. 나는 소주 한 병 먹으면 아예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수준이 되고, 맥주는 꽤 먹긴 하지만 맥주 한 잔만 마셔도 일단 얼굴은 엄청 새빨개진다. 그렇다고 해서 필름이 끊긴 채, 술주정을 하며, 술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걱정을 한 몸에 받을 정도로 먹는 스타일은 절대 아니다. 적당히 취한 것 같다 싶으면 소주잔에 사이다를 따른 뒤 어떻게 해서든 같이 건배를 하며 노는 스타일이다.


 음주 후 홍조에 시달리는 사람이 간혹 있다. 그게 나다. 얼굴이 새빨개지는 것에 대해서 혹자는 귀여운 핑크빛(개인적으로 드라마에서 핑크 블러셔를 떡칠한 채 취했다고 말하는 상황 설정 정말 싫다.)을 생각할 수 있겠으나, 인생은 그렇게 녹록치 않다. 안색이 정말이지 흑적색으로 변해가기 시작하는데, 혈관 확장까지 동반해서 얼굴이 약간 붓는다. 붓고 빨개지고 얼굴색이 얼룩덜룩해진다. 정말이지 못봐주는 꼴이 될 뿐만 아니라, 문제는 이게 주변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다는 것이다.

-헐. 너 얼굴 완전 빨개.

-괜찮아? 너 완전 취한거 아니야?

-에이 완전 보호색이네~ 나도 얼굴 빨개져서 술 취한 티 좀 나고 싶다

 이런 논조를 동반하는 수많은 말들! 에휴… 편하게 술을 먹을 수가 없다. 걱정해주는 걸 수도 있고, 귀여워(?)하는 걸수도 있지만, 얼굴이 빨개진다는 건 나의 즐거운 술자리를 방해하는 강력한 요소가 된다. (여기서 tip : 얼굴이 빨개지는 걸 보고 아무 말도 안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너 편한대로 술 마셔~” 이 한마디면 충분히 배려받는다고 느낀답니다 헤헤)


 하지만 술을 못마신다고 술 맛을 모른다거나, 술자리를 좋아하지 않을거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나는 꽤나 맥주맛을 좋아하고, 와인맛을 어느 정도 감별해낼 줄 알며, 양주를 좋아한다…! (새빨개지는 얼굴은 디폴트)

 밤에 먹는 시원한 맥주 한 잔을 정말 좋아하는데, 사실 맥주 한 캔 자체의 알콜량이 나에게는 다음날 출근하는데 부담이 된다. 그래서 무알콜 맥주를 즐겨 먹는다. 씁쓸한 보리맛과 뒤이어오는 목 따가우는 탄산, 식도가 아려오는 차가움. 그 자체로 힘든 하루를 보상해준다. 좀 맛있다 싶은 날엔 무알콜 맥주 2캔을 연달아 먹는데, 그러면 남자친구한테 연락이 온다.

“오늘은 과음하네ㅋㅋㅋㅋㅋㅋ?”


 술알못이 양주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웃기게 들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건 궁극의 미니멀리스트가 명품만 한 두개 사서 입고 다니는 느낌과 비슷한 거다. 술도 잘 못 마시는데, 맛없는 술로 나의 해독작용을 쓰고 싶지 않다. 양주를 마시면, 금방 알싸하게 취한다. 그리고 그 상태로 오래 간다. 숙취는 없고 말이다. 양주에서 나오는 그 나무향이 요새 참 좋다.

이래서 사람들이 양주를 마시는구나! 이래서 양주가 비싸구나!


 다시 태어나면 어떻게 태어나고 싶냐는 말에, 10년째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술을 궤짝채로 마시는 여포같은 사람>

 술자리를 좋아하되 술을 못먹는 나는, 여전히 서럽고 안타까울 때가 많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내 유전자에 술을 잘 먹는 능력은 없지만, 대신 술을 안먹고 과음 텐션으로 갈 수 있는 능력은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지 뭐. 그래도 술 잘먹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진짜 그 능력 소중히 여기세요! 누군가에겐 그 어떤 초능력보다 갖고 싶은 능력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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