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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꺼꿀이 Feb 25. 2022

할머니의 명복을 진심으로 빌어요.

2022년 02월 20일 길고 긴 여행을 끝낸 할머니를 생각하며.

할머니는 명절날 가면 항상 새 양말을 우리에게 주셨다. 이미 양말을 잘 신고있는데도, 조상님들께 차례 지내려면 새 양말을 신어야한다며 시장에서 사신, 취향에도 맞지 않는 양말들을 던져주셨다.

그리고 밥 먹을 때는 항상 이거 먹어라, 저거 먹어라 하면서 이리저리 훈수를 두셨다. 그러면 나는 항상 ‘여자들 좁은 테이블에 앉히지나 말지’ 이러면서 입을 삐쭉 댔다.

얼굴에 여드름이 나면 할머니는 얼굴이 왜 이러냐, 이러면서 스트레스를 주기도 했다.

고등학생 때는 꼭 서울대를 가야한다고, 우리집에 서울대 합격자는 한 명 나와야 한다며 나에게 대놓고 부담을 주기도 했다.

할머니 침대에는 항상 꼬릿한 냄새가 났고, 음식은  내 입맛에 안 맞아서 왠지 할머니 음식은 잘 먹히지가 않았다.

나는 할머니랑 놀러간 적도 많지 않고, 둘만의 소중한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할머니를 생각하면 불편했던 게 많이 떠올랐다. 그런데 할머니가 없는 초상집은, 편했는데 싫었다. 나한테 뭘 먹으라고 종용하는 사람도, 괜한 결혼 얘기를 꺼내는 사람도, 양말에 대해 꾸지람을 하는 사람도 없었고, 그래서 엄청 편했는데 그게 참 싫었다.

나는 할머니가 불편했는데 좋았나보다. 할머니가 줬던 불편함과 어색함을 다시 느낄 수 없다는게 너무 슬프다.


우리 아빠는 언제나 그렇듯 할머니 앞에서도 별 말 없는 무뚝뚝한 막내아들이었다. 할머니가 우리 아빠의 어린 시절 흑역사들을 줄줄 읊어도 가만히 웃는 그런 아들. 술만 먹으면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 할머니 앞에서 춤추다가 술이 깨면 다시 얌전해지는 그런 아들.

아빠는 장례식장에서 끊임없이 울었다. 눈이 퉁퉁 부은 아빠는 우리 자매가 장난을 쳐야 그제서야 미소를 보였다. 아빠는 이제 엄마가 없다. 직장에선 모두에게 인사를 받는 근엄한 우리 아빠를 보며 예쁘다고, 귀엽다고, 너무 잘생겼다고 해주는 엄마가 이제는 없다.

눈시울이 빨개진 채로 오른 어깨에 하얀 띠를 두르고 있는 아빠가 참 작아보였다. 그리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울고 있을 아빠 곁엔 오래도록 내가 있을 수 있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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