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꺼꿀이 May 19. 2022

나는 왜 책을 읽는가

여러분은 왜 책을 읽으시나요

여러분들은 긍정과 부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긍정과 부정의 뜻에 대해 그다지 깊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략 좋은 말이면 긍정적인 것이겠거니, 듣기 불편하고 비난의 논조는 부정적이겠거니 생각했다. 긍정의 힘은 위대하고, 부정의 힘은 사악하겠거니 생각했다. 여러분들도 나의 의견과 비슷하다면, 나와 같이 긍정과 부정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최근 긍정과 부정의 정확한 개념에 대한 강연을 들었다. 벌어진 현재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찾아 실천하는 것 ; 이것이 <긍정>의 실제 뜻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부정>은 그의 반대일 것이다. 벌어진 현재 상황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조차 못한 채 방황하는 것. 그렇다면 모든 것을 좋다고 생각하고, 무조건 나은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긍정>일까? 그건 사실상 <왜곡>이라고 한다. 그렇다. 여러분들은 혹시 <긍정>이라는 이름 하에 많은 것을 <왜곡>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하지만 긍정과 왜곡이라는 개념 사이에서 이렇게 한가하게 장난할 시간이 없는 사람들도 있다. 현재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조차 폭력이라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내 주변에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 내가 살아온 환경은 그런 사람들을 원천 차단해왔으니까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내 수준에서 우러러볼만한 사람들도 너무 많지만, 나의 아래를 내려다보기 시작하면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득해질 것이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무릎이 후들거리고 덩달아 나도 떨어질까봐 무서울테니, 어쩌면 어느 순간 위에만 보는 게 편해졌을 수도 있다. 사계절이 바뀌어갈 때마다, 나는 자꾸만 더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는 사람이 되어간다. 조금 더 위로 가야만 할 것 같고, 내가 비교적 위에 있다는 사실을 티내는 사람이 되어간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내 안의 조그마한 욕망이 나를 책으로 이끈다.  비록 죽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이름 석 자를 가지게 될 것이고, 심지어는 묘자리를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삶이었을지라도, 최선을 다하는 그런 삶을 적어놓은 책 말이다. 그니까 다른 말로 하면, <긍정>을 적어 놓은 책들 말이다. 왜곡할 현실조차 갖고 있지 않지만,  가족과 연인과 친구와 함께 웃음과 슬픔과 분노와 평화를 나누는 그런 삶에 나는 주목하게 된다. 그런 삶을 볼 때면 내 인생은 경도가 아니라 위도로 측정이 된다. 수직선이 아니라 수평선이 되고, 짓밟기가 아니라 어깨동무가 된다.

가끔은 내가 위선자같기도 하다. 아니, 나는 확실히 위선자다. 그럴거면 명품 커플링 할 돈으로 기부를 하지 그랬어? 주말마다 호캉스 갈 시간에 무료 봉사활동을 하지 그랬니? 나의 이런 고민들 자체가 자본주의와 타협한 한 인간의 한계이려나 싶기도 하고. 이런건 차근차근 고민좀 해봐야겠다.

현실을 왜곡하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시대다. 긍정의 힘이라고 표방하면서 사실상 왜곡을 부추기는 시대이기도 하다. 숨차게 돌아가는 현대사회에서 내가 어떤 어른이 되고 싶었는지 상기하면서 살기란 쉽지 않다. 19살의 내가 어떤 마음으로 공부를 했고, 그런 자그마한 성취들로 어른이 되어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었는지 까먹기가 너무 쉬운 세상이다. 그 때 나는 책을 펼친다. 그 책 속엔 내가 자체 필터링을 통해 애써 무시하고 있던 세계가 빼곡하게 적혀있다. 이 세상을 같이 사는 인간으로서 무시해서는 안되는 세계들을 읽고나면 머릿 속이 재정립된다. 내가 무엇을 잊고 있었는지, 무엇을 추구해야하는지 환기가 되면서 비로소 스스로를 다그치고 타이른다. 그게 위선 혹은 가식일지라도, 올바르게 살고 싶어지는 날이 또 연장된다. 삶의 의미가 명확해지고 행복해지며, 다시 열심히 살고 싶어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enfj에게 infp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