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에 와서 친해지게 된 한 친구가 있다. 근데 그 친구와 함께 다니면 묘하게 삶이 꼬인다. 여기서 꼬인다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정말로 시간적, 물리적으로 꼬인다는 의미다. 나는 어릴 때부터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을 귀찮아하고 두려워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낯선 어딘가에 가서 하룻밤 이상을 자고 오는 것은 최고의 스트레스였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나에게 취침 전 시간은 낮동안의 지친 몸을 가지런히 정비하고, 경건하게 다음 날을 준비하고, 온전히 나만을 위해 충전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에 얼레벌레 씻고 내 소유의 이불이 아닌 곳에서 잠이 든다는 것은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었다. 아무튼 이런 나의 삶을 발랄하게 비틀어준 친구가 바로 esfj다.
그녀는 말그대로 열정인간이다. 같은 직군에 속해있어 우리 일이 얼마나 에너지를 갉아먹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저렇게까지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다는 것에 경악스러울 정도다. 대학시절부터 지금까지 해온 취미만 해도, 드럼/테니스/댄스/공연 동아리/봉사/보컬 등등이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방학 때 해외여행은 빼먹지 않고 한 달 이상은 나갔으며, 심심하면 혼자 서슴없이 국내여행을 하기도 한다. 하고 싶은 것이 생기면 즉시 알아보고, 즉시 한다. 그녀에게 뭘 같이 하고 싶다는 말은 조심스럽게 해야한다. 왜냐면 다음날 바로 계획서가 날아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을 진짜 좋아한다. 나 또한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라서 내 사람은 끔찍하게 챙기지만, 생각보다 새로운 인물에게 접근하는 것은 꺼리는 편이다. 낯을 많이 가리고, 어색한 사람들 앞에선 한마디도 하지 않는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주고, 여기저기 놀러가자고 해주고, 편지도 써주고, 연락도 많이 해준 너무 감사한 친구다. 이 친구는 나와는 다르게 새로운 사람에게도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편이라서, 만날 때마다 새로운 그룹의 친구가 생긴다.
-오늘은 누구 만나? 아 중학교 친구들!
-어제는 누구 만났어? 아 런던가서 만났던 동행친구들!
-내일은 누구 만나는데? 아 작년에 강의들었던 선생님!
대략 이런 느낌이다.
이제 슬슬 이 친구 덕분에 내 인생이 꼬인 일화를 풀어볼까 한다. 우리 대학교에는 교양 수업들이 엄청나게 많은데, 특히 요트라든지 캠핑이라든지 승마라든지 2박 3일로 여행을 갔다오는 교양수업들이 유명했다. (2박 3일 고생해서 3학점을 손쉽게 채울 수 있다는 이점이 있으나 돈과 시간, 에너지가 너무 많이 드는 수업…) esfj 친구는 그 교양수업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눈을 반짝이며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정말 가기 싫었다. 낯선 잠자리 / 어색한 사람들 / 50명이 넘는 단체생활… 가지 않을 이유만 산더미였다. esfj가 그 수업을 권유한 순간 너무 무서웠고, 어떻게든 거절할 생각에 머리를 따글따글 굴리고 있었다. 하지만 enfj는 esfj의 열정을 절대 이길 수 없다. 그녀는 몇날 며칠을 설득했고, 또 설득했다. 나는 약간 짜증이 났으나, 답은 가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있었고 그렇게 그녀와 여러가지 교양수업을 다녔다.
돈을 주고, 모르는 사람들과 요트 수업을 간다? 내 인생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걸 가능케 했다. 나는 요트 수업을 계기로, 이상한 산 속에 박혀 캠핑하고, 액티비티하고, 훈련받는 캠핑수업도 갔다왔고 그녀와 10일이 넘는 미국, 영국 여행도 갔다왔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고 무려 3주짜리 대만 연수도 갔다왔다. 그 모든 여행 중간중간에 나만의 신성한 취침전 의식을 치를 순 없다는 것이 물론 괴롭기는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정갈하게 살지 않아도 나름 괜찮다는 것을 깨달았고, 새로운 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각, 경험, 감정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처럼 그냥 한 번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걸 느꼈다.
3년전의 나는 mbti가 esfj로 나올 때가 있었는데, 그 순간은 내가 가장 바쁘고 치열하게 살 때였다. 어쩌면 그 순간 나는 esfj친구처럼 살아야만 생존할 수 있었나 싶기도 하고, 혹은 그녀의 에너지처럼 강력한 에너지를 차용해 그 순간을 버텨내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s와 n 한 끗 차이지만 너무 다른 우리 둘. 지금은 서로 자주 보지 못하지만 가끔 만날 때마다 그녀의 에너지에 응원받게 되고, 본받고 싶어진다. 지금까지 esfj의 간택을 받아 행복한 enfj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