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그는 스스로를 꽤나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는 또래에서 나쁘지 않은 평판을 받고 있다. 귀여운 느낌의 외모, 자신의 전공을 백프로 살려줄 수 있는 든든한 집안, 건축학과에서는 내로라 하는 좋은 학벌, 남들의 기분을 어렵지 않게 맞춰줄 수 있는 수려한 말솜씨까지 그는 스스로를 괜찮게 생각할 만 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듯 스스로 아쉬운 점도 있었다.
그는 키가 좀 작았다.
20대 중반의 남자치고 160중반이면 상당히 작은 축에 속했다. 어느 집단에 가도 키가 작다는 말은 항상 들었으며, 키 때문에 만나기도 전에 소개팅에서 거절당한 적도 여러번 있었다. 물론 그의 성격과 외모와 여러가지 능력 덕분에 키를 상쇄했던 적도 많았지만, 뿌리깊은 열등감으로 인해 키를 상쇄했던 에피소드들은 아쉽게도 그의 머릿속에서 잊혀져 갔다.
사실 따져보자면, 이러니 저러니 키가 작아서 그의 인생이 불행해진 건 아니다. 그는 충분히 인생을 즐기며 살았다. 학창시절에 그의 귀여운 외모에 반해 2-3명의 여학생이 사랑의 편지를 주기도 했었다. 건축일을 하고 싶던 그의 꿈과, 건축 쪽에서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회사를 운영하는 외삼촌의 상황이 퍼즐처럼 딱 맞아 떨어지기도 했다. (심지어 외삼촌은 조카들 중 그를 가장 예뻐했으니 얼마나 운이 좋은가.) 또한 타고난 공감능력과 언변으로 다양한 친구들을 만나며 세상에 대한 관점을 이리저리 넓혀갈 수 있었던 청춘이었다.
원래 비극이란 건 예상치도 못한 시점에 일어난다. 예상했던 일이 일어난다는 건 인간을 비극적으로 만들지 못한다. 예상치도 못하게,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장소에서 일어난 교통사고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 인간은 그제서야 비극적이여진다. 그에게 닥친 비극 또한 예상할 수 없는 시점에 발생했다.
건축학과에서 설계 과목은 중요한 과목이다. 하지만 설계 제출물을 내기 위해서 주어지는 시간은 중요도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밤을 새며 건축학도들은 설계 완성물을 만들어낸다. 그 비극의 밤에도 그는 어김없이 설계를 하고 있었다. 누가 더 많은 밤을 새는지 경쟁이라도 하듯, 설계실 동기들은 새벽 3시 40분에도 모두 눈을 새빨갛게 뜨며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는 매운 라면과 달콤한 초코우유를 먹어야 잠이 깬다. 도저히 잠을 견딜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이고 편의점에 달려갔다. 그 새벽에 누가 전단지를 줬던 것도 같은데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을 못할 정도로 졸음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그는 쉴새없이 먹어댔고, 매운 맛과 단 맛으로 취침 시간을 5시간 정도 연장했다.
다시 설계실로 들어서려 할 때, 그의 비극이 시작된다.
-언니는 우리 동기 중에 누가 제일 맘에 들어?
-나는 지환이.
-지환이는 근데 피부가 좀 안좋지 않나...나는 차라리 성준이가 나은거 같은데
-야, 성준이 키 너무 작잖아. 키작은 남자는 진짜 남자로도 안보이지 않냐?
-응, 그건 그래. 근데 걔는 얼굴이 괜찮으니깐...
-야 그럼 너 성준이가 고백하면 사귈 수 있어?
-아, 그건 아니지 언니. 내가 아무리 키를 안본다고 해도 나보다 작은 애는 안돼.
-맞아. 이게 딱 키가 어느정도 커줘야 가슴이 두근두근대는 그런 게 있잖아?
-응, 나는 진짜 성준이를 보고는 그런 거 느껴본 적 없어. 뭐 걔도 나 여자로 안볼테지만...!
그의 머릿속에서 강렬하게 장기기억으로 남아버린 대화들은 이정도가 되겠다. 그는 쉽사리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그는 키작은게 단점이라고 느끼긴 했으나, 스스로를 매우 괜찮은 남자라고 생각했었기에 마음은 더더욱 상처투성이였다. 또한 그를 보고 두근거림을 느껴본 적 없었다던 동기 여학생은, 하필이면 그가 마음에 여러번 품어봤던 여학생이었다. 그는 설계실로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다. 자의, 타의로 잠이 확 깨버린 그는 대학가 근처에서 가장 비싼 그의 자취방으로 돌아갔다. 이런 집에 살면 뭐하나, 키작다고 나를 남자로도 안보는데 싶은 마음을 어깨에 지고, 배꼽에서부터 터져나올 것 같은 욕설을 참아가며 그는 에코백 안에 있는 물품들을 책상으로 하나하나 빼내면서 아까의 그 사건을 끊임없이 곱씹고 있었다. 그 와중에 에코백 안에서 꾸깃꾸깃해진 전단지 한장을 발견했다. 아까 편의점에 가면서 누가 주었던 전단지다. 그 새벽에 누가 전단지를 돌리겠냐 싶어 꿈인줄 알았건만, 실제로 받은 게 맞았던 그 전단지 내용을 찬찬히 읽어봤다.
전단지는 누군가가 손글씨를 이용해서 날림으로 만든 것 같았으나 자극적인 슬로건과 자세한 건물위치는 때마침 불안정한 그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그는 잠이 드는 순간까지 그녀들의 뒷담과 전단지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고 다음날 아침이 되자마자 하준오 연구소라는 곳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