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뜨거운 7월, 햇빛은 작열하고 초록빛 나무는 맴맴 비명을 지르고 있는 어느 날이었다. 아스팔트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공기 자체가 끈적한 꿀처럼 무겁게 늘어져 있다. 만물은 화려했고 풍성했고 뜨거웠으며, 그 타는 듯한 이글거림은 오히려 주변을 고요하게 만드는 그런 여름 날씨.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작고 인적이 드문 편의점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진 간판, 유리문에 붙은 바래진 광고지들, 그리고 한쪽 모서리가 살짝 깨어진 자동문까지, 시간이 이곳만 비껴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모든 것이 그 때 그대로였다.
은성이 편의점 문을 열자 띠링- 종이 울렸다. 1년 전과 똑같은 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어 가슴 한구석을 건드린다. 편의점에 들어서자, 몸을 조이는 에어컨 냉기가 순식간에 은성의 몸을 휘감는다. 뜨거운 바깥 공기와 차가운 실내공기의 경계선에서 잠시 서성이며, 은성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차가운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들면서 가슴이 서늘해진다.
형광등 불빛이 내리쬐는 가운데, 라면 코너 앞에 서서 은성은 잠시 망설였다. 빨간 포장지에 굵은 글씨로 적힌 제품명이 눈에 들어왔다. 1년 전 그날, 그와 처음 만났을 때 샀던 바로 그 컵라면이었다. 빨간색 포장지의 색깔도, 글씨체도, 심지어 가격표까지 모든 것이 그때와 똑같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린다. 이 컵라면을 집어 들면, 순식간에 1년 전 그날로 미끄러져 들어갈 것 같다. 그때의 놀람도, 두근거림도, 그리고 그 이후의 모든 일들까지도 다시 생생하게 되살아날 것 같다. 그 기분을 감당할 수 있을까. 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기억 앞에서는 여전히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감당할 수 있을지 없을지 은성조차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그 라면을 집어 든다. 라면을 들고 계산대로 가자 젊은 아르바이트생이 졸린 눈을 하고, 기계적으로 바코드를 찍었다.
"천오백 원입니다."
그때도 이 카드로 계산했었나. 그때는 어떤 아르바이트생이 계산을 해주었을까.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서자마자 젓가락이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진다. 마음이 급하면 항상 이렇게 무언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만다. 1년 전에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다. 어떤 것들은 정말 변하지 않는 것 같다. 자신의 서투른 습관까지도.
읏차- 하고 젓가락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굽히던 찰나, 갈색빛의 무언가가 언뜻 그녀의 시야에 포착된다. 처음에는 그림자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림자라기엔 너무나 재빠르다. 마르고 날렵한 몸집, 우아하게 움직이는 걸음걸이, 그리고 뜨겁고 오묘한 눈빛. 고양이였다.
주황빛의 묘하게 투박한 털을 지닌 고양이는 그녀의 발 앞에 물고 있던 젓가락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선다. 호박색 눈동자로 그녀를 한번 바라보더니, 꼬리를 살랑이며 골목 안쪽으로 사라져간다. 그 호박색 눈동자에는 익숙한 따뜻함이 있었다. 1년 전 그가 자신을 바라보던 바로 그 시선과 닮아 있었다. 은성의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은성은 확신을 가지고 젓가락을 주었다. 고양이가, 아니 그가 보낸 신호일 것이다. 1년 전 그날을 분명 그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은성은 그때도 이렇게 젓가락을 떨어뜨렸었다. 뜨거운 여름 햇살 아래서, 똑같은 편의점 앞에서,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었다. 그리고 한 남자가 그것을 주워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어주며, 은성이 가장 좋아하는 얼굴을 하고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