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함께 살고 싶다 2편

민호가 다시 여기에

by 꺼꿀이

2025년 새해를 앞두고, 민호는 은성에게 결혼하자고 말했다.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시끌시끌 타종 카운트다운이 한창이었고, 거실 테이블 위에는 치킨 한 마리와 맥주 캔들이 어수선하게 놓여 있었다. 은성은 알겠다고 했다. 낭만적인 건지, 초라한 건지 알 수 없는 그 상황 속에서 은성은 어렴풋이 ‘이런 것이 행복한 거구나.’ 생각했다. 책이나 영화에서 그려지는 뜨거운 사랑이나 운명적인 만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이것도 나름의 행복이었다. 평생 민호와 살 수 있을지 확신할 순 없었지만, 평생 민호와 살겠다고 맹세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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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성은 담담한 프러포즈를 받은 뒤, 민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본인과는 다르게 뽀얀 민호의 피부가 좋았고, 키는 살짝 작아도 듬직하게 떡 벌어진 어깨도 좋았다. 쌍꺼풀이 옅지만, 시원시원하다는 인상을 주는 눈매도 좋았고, 얇은 듯 도톰한 분홍색 입술도 좋았다. 여름만 되면 빨갛게 그을리는 꽤 준수한 코도 좋았다. 그런 민호는 심지어 같이 살기에 무난한 성격까지 겸비했다. 은성은 그런 민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은성은 민호와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마음이었다.

신파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약혼자의 교통사고 소식은 은성을 더 이상 현실에 발붙일 수 없게 만들었다. 주말에 만나서 같이 웨딩드레스를 보러 가기로 했던 민호가 게임 캐릭터 삭제되듯이 죽었다. 금요일까지 문자를 주고받았던 민호가, 토요일 아침에 헬스장에 갔다 오겠다던 민호가, 일요일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 뒤의 일을 은성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병원 응급실의 차가운 공기라든지, 중환자실 앞 의자의 딱딱한 감촉이라든지, 민호 가족의 흐느끼는 소리라든지, 뜨문뜨문 조금의 기억들만 남아있다. 병원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장례식장에서 조문객들을 맞이하고, 그의 물건들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은성은 마치 게임을 하는 것만 같았다. 게임 속 현실 기시감이 너무 커서 플레이어의 기분을 더럽게 만드는 그런 게임. 본인이 아무리 직접 조작하려고 해도 알아서 자동으로 플레이되는 그런 게임. 아무리 다시 리셋 버튼을 눌러봐도 꺼지지 않는 그런 게임.

현실을 받아들인 후에는 더욱 참혹했다. 한의원에서 환자를 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생계를 위해 한의원에서 침을 놓고 있는 스스로가 역겹게 느껴져, 침을 놓다가도 토하러 간 적이 한두 번이 아녔다. 대표원장은 은성에게 누누이 휴가를 쓰라고 했지만, 사실 집에만 있는 것이 더 고역이었다. 은성의 영혼은 그저 부유하고 있었고, 육신만 허우적대며 일상을 버티고 있었다. 밥을 먹어도 맛이 없었고, 잠을 자도 꿈에서 민호를 찾았다. 친구들의 위로도, 부모님의 걱정도 모두 공허하게 느껴졌다. 창창한 나이에 죽은 민호에 대한 연민과, 창창한 나이에 과부 비스무리한 것이 된 스스로에 대한 연민은 무럭무럭 싹이 되고 이파리를 피우고 열매를 맺어갔다.

그렇게 거의 1년을 폐인처럼 지냈다. 계절이 4번이나 바뀌고 나니, 은성은 그나마 민호 생각을 덜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변할 건 없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것이 맞지만, 너무 잘 살면 안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은성의 친구들은 차츰 회복되어 가는 은성을 붙잡고 혹시 새로운 사랑을 해보는 것이 어떨지 매우 조심스럽게 권유하기도 했다. 은성은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슬프게 웃어 보였는데 그 표정은 은성이 태어나서 처음 지어보는 표정이었을 것이다. 민호를 잃고 은성은 새롭게 배운 표정들이 많아졌다.

계절이 4번 더 바뀌고 나니, 은성은 민호 생각을 일부러 해야 할 정도로 회복되었다. 흉터까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비 오는 날 흉터가 욱신거리듯, 가끔은 눈물이 주체가 안 될 정도로 민호라는 흉터는 욱신거렸다. 하지만 은성은 아주 좋아졌고, 아주 크게 진심으로 웃는 날도 많아졌고, 그럴 때마다 여전히 뭇 남성의 마음을 흔들 정도로 눈부셨다.

어느 날, 은성은 외로운가? 싶은 날들이 생겨 남자를 만나보려 노력했지만, 은성에게 민호는 참 대체 불가능했다. 얼마나 계절이 바뀌어야 민호를 완전히 잊을 수 있을지 은성은 겁이 나기도 했다. 어느 때는 꿈속에 민호가 나타나 다른 남자와 데이트하는 은성을 타박한 적이 있었다. 손으로 미간을 짚으며 인상을 쓰던 민호. 민호가 화날 만했다. 은성은 꿈에서 깨서 죄책감에 짓이겨졌다. 은성은 여전히 민호와 함께였다.

2027년 7월, 유난히 추나 치료가 몰려 고단한 하루였다. 목과 어깨, 허리가 쑤시는 환자들을 하루 종일 치료하다 보니 정작 본인의 목과 어깨가 더 아팠다. 손목도 시큰거렸고, 발도 퉁퉁 부어 있었다. 집에 가서 제대로 된 저녁을 해 먹어야 한다는 생각은 이미 포기했다. 은성은 편의점에 들러 아이돌들에게 유명하다는 샌드위치와 컵라면, 초코우유를 샀다. 언제부터인가 이런 식의 식사가 당연해져 버렸다. 영양가는 둘째 치고 맛도 별로였지만, 간편함을 당해낼 수 있는 음식은 없었다.

음식을 손에 잔뜩 든 채, 은성은 편의점을 나섰다. 계산한 카드를 입에 물고 젓가락을 들고 가다가 젓가락이 떨어져 버렸다. 초가공식품 뭐가 좋다고 이렇게 많이 샀나, 후회하며 주섬거리던 은성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바닥에 떨어진 젓가락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구부리려던 참이었다. 누군가의 손이 먼저 젓가락에 닿았고, 그 손의 주인이 입을 열었다.

"이거 떨어뜨리셨네요."

목소리가 들린 순간, 은성의 온몸에 전기가 흘렀다. 2년이 지났지만 잊을 수 없는,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그 목소리. 설마. 설마 그럴 리가. 은성의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고개를 드는 순간, 의미 없고 무감각하게 흐르던 은성의 시간이 멈췄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사라졌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그녀의 눈앞에 민호가 서 있었다. 분명히 민호였다. 하지만 동시에 민호일 수 없었다. 은성은 두 눈으로 민호가 죽은 것을 확인했다. 차가운 침대에 누워 있던 민호의 모습을, 영원히 감긴 민호의 눈꺼풀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민호가 살아 돌아왔을까? 민호가 환생했나?

"아, 아니…. 어떻게…."

은성의 입술이 떨렸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이 바짝 마르고, 혀끝이 굳어버린 것 같았다. 손에 들고 있던 샌드위치와 컵라면, 초코우유가 바닥으로 떨어져 나갔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민호의 얼굴이 분명했다. 새하얀 피부도, 쭉 뻗은 눈매도, 마음에 쏙 들던 콧날도, 입을 맞추면 촉감이 좋던 그 입술도 그대로다. 은성은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다리에 힘이 빠져서 주저앉았다. 그동안 꾹꾹 눌러 담아둔 그리움이 일시에 터져 나왔다. 2년 동안 참아왔던 모든 감정이 한순간에 폭발했다. 일만 하며 버텨온 나날들, 민호는 없지만 민호와 항상 함께하는 하루하루를 견뎌내기 위해 애써 눌러놨던 마음이 한순간에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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