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뻔한 부탁
호랑이는 하늘계에서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그래도 이 가녀린 인간 여성이 더 이상 길바닥에서 이렇게 울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호랑이는 천천히 은성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인간의 몸을 움직이는 게 아직은 어색했지만, 최대한 부드럽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의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자, 은성의 울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은성은 흐릿한 시야 사이로 그 손을 바라보았다. 은성은 무언가에 홀린 듯 민호로 추정되는 ‘민호’의 손깍지를 자연스럽게 꼈다. 그러자 ‘민호’가 주춤하는 것이 느껴졌다. 호랑이에게는 이런 접촉이 낯설었다. 호랑이의 온몸이 경직되는 것을 본 순간, 은성의 마음이 착 가라앉기 시작했다. 민호라면 은성의 손깍지를 피할 리가 없었다. 은성이 사랑하는 민호였다면 자연스럽게 엄지로 은성의 손등을 쓸어주었을 것이다.
집에 가서 천천히 이야기하자는 ‘민호’의 제안에 은성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민호와 똑같은 목소리였지만, 말하는 방식이 조금 달랐다. 더 조심스럽고, 더 순수했다. 좀 어린 것 같았다. 그렇다고 민호가 어려진 것 같지도 않았다. 민호는 좀 더 차가운 말투였다. 어렸을 때는 더더욱 차가웠고, 어쩔 땐 냉정하기까지 한 말투를 구사했었다.
은성이 민호와 ‘민호’에 대한 생각을 하느라 어색한 손깍지를 풀지도 못하고 집으로 가는 길, ‘민호’는 줄곧 은성을 걱정하며 괜찮냐고 물었다. 은성은 대답 대신 그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정말 민호였다. 하지만 민호가 아니었다. 민호는 은성과 걸을 때 이렇게 조심스럽게 강아지처럼 걷지 않았다. 민호는 항상 반 발짝 앞서 걸으며 은성이 따라오기를 기다렸었다.
무엇보다 민호는 2년 전까지 거의 매일 왔다 갔다 했던 은성의 집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지금 옆에 있는 ‘민호’는 처음 가는 곳으로 끌려가고 있는 모양새였다. 묘한 기분이었다. 은성은 집까지 가는 20분 동안 ‘민호’가 민호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어색하게 집에 도착한 뒤에 은성은 ‘민호’에게 식탁에 앉자고 했다. 은성이 사랑했던 민호는 항상 부엌 쪽 의자에 앉았다. 그게 은성과 민호의 규칙이었다. 3년 만에 집에 돌아온 ‘민호’는 갈팡질팡하다가 거실 쪽 의자에 앉았다. 가장 무난해 보이는 자리이자, 손님이 앉을 법한 자리였다. 은성은 ‘민호’가 앉았을 뿐인데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다. 이 집을 완전히 낯선 공간으로 여기는 그 태도에 은성의 가슴은 또 한 번 무너졌다.
너는 누구니, 도대체.
은성은 냉장고에 들어 있던 사과주스 한 잔을 벌컥벌컥 마신 뒤, ‘민호’에게도 한 잔을 따라주고, 부엌 쪽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민호’의 가슴팍을 바라보았다. 얼굴을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너무나 그리워했던 그 얼굴이, 동시에 전혀 다른 누군가라는 사실이 고통스러웠다.
‘민호’는 머쓱한 듯 이마를 긁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손가락 끝이 이마에 닿을 때마다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자신은 사실 인간 남자가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호랑이라고 소개했다. 목소리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리고 은성과 함께 악귀들과 싸워야 한다고 덧붙였다. 자신의 영물인 호랑이 이빨을 가지고 있으면 자신을 볼 수 있을 것이고, 호랑이 이빨을 쥐게 되면 자신과 생각이 통하게 되니 전투를 이끌어 주면 된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말하는 동안 ‘민호’의 표정은 진지했고, 농담하는 기색이라곤 전혀 없었다. 호랑이는 거침없이 본인의 상황을 지껄였다. 은성이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중요치 않아 보였다. 민호의 얼굴을 한 호랑이는 당장이라도 은성과 악귀를 물리치러 갈 모양새였다.
은성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잊은 채 현실감각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호랑이? 악귀? 전투? 이 모든 게 꿈인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정말로 자신이 미쳐버린 건가? 하지만 확실한 건 ‘민호’가 말하고, 웃고, 부탁하고, 숨을 쉰다. 그 모든 것이 너무나 생생했다.
은성은 벙찐 표정을 하고는 벌떡 일어나서 냉장고 문을 연 뒤, 다시 사과주스 한 컵을 재빠르게 비웠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사과주스의 차가운 감촉을 느끼며 ‘민호’가 말한 소개말을 다시 곱씹어 보았다. 모든 문장이 하나도 빠짐없이 다 개소리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되는 내용이었다.
특히 영물이 있어야 자신을 볼 수 있다는 개소리는 즉시 반박이 가능했다. 은성이 ‘민호’에게 이 점에 대해서 다그치자, 호랑이는 미안한 듯 웃으며 은성의 핸드백에서 날카로운 호랑이 이빨을 꺼내 보였다. 께름칙해하며 언제 넣었냐고 물어보자, 편의점에서 젓가락 주워줄 때 몰래 넣어뒀다고 해맑게 대답하는 ‘민호’를 보니 은성은 더욱 심란해졌다. 그 순간의 친절이 철저히 계산된 행동이었다는 것이 묘하게 배신감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본인이 지껄여 놓은 말을 의심할 리 없다고 생각하는 ‘민호’의 표정은 답도 없어 보였다.
은성은 그 순간 물어보고 싶은 것이 하나 생겼다.
“일단 뭐 알겠고…. 근데 혹시 그 악귀라는 거를 무찌르는 동안에는 나랑 같이 있는 거예요?”
“네, 맞습니다. 저는 당신 없이는 그 악귀를 무찌를 수 없으니깐요. 같이 있는 것뿐만 아니라 같이 살아야 해요, 저랑. 그 점에 대해서도 미리 말해야 했네요, 생각해 보니. 오늘 참 저 때문에 고생하십니다…. 아직 제가 너무 부족하죠…. 죄송해요….”
3년 전 죽은 약혼자의 환생. 하지만 그 고운 얼굴을 하고선 1호선 광인처럼 지껄이는 헛소리.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제안하는 뻔뻔한 동거 선언. 마가 껴도 단단히 낀 하루였다. 이보다 더 기막힌 상황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은성에겐 나쁘지만은 않은 제안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거부할 이유를 찾기가 더 어려웠다. 어차피 민호 없는 삶은 의미가 없었다. 2년 동안 겨우겨우 버텨온 나날들이 얼마나 공허했는지, 민호를 잃은 흉터가 얼마나 깊은지, 표현하려고 해도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었다. 이 사람이 진짜 호랑이든, 환상이든, 아니면 은성 스스로가 조현병 환자가 되어 미쳐버린 거든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편의점에서 민호를 쏙 빼닮은 형태를 본 순간, 사실 은성은 그 형태를 이길 방도가 없었다. 민호의 형태를 한 그것과 일단은 함께 있고 싶었다.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다른 건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이든 지금은 상관없었다.
은성은 그래요, 같이 삽시다, 라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