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스며들다
호랑이의 변신쇼가 있던 날 이후, 둘의 동거는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집에서의 변화는 곧 직장에서의 변화로 이어졌다. 일단 은성의 점심 풍경이 달라졌다. 김밥 한 줄. 편의점 삼각김밥. 때론 아이스 커피 한 잔. 동료들이 "원장님, 같이 먹어요" 하고 불러도 그녀는 이미 진료실로 사라진 뒤였다. 점심시간에도 침을 놓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은성이 이렇게 폭주기관차처럼 쉬지도 않고 일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집에 얼른 가기 위해서.
은성과 같이 일한지 오래된 김지연 간호사는 그녀가 화장실에서 나올 때마다 그녀를 훔쳐봤다. 뭔가 달라진 것 같은데 뭐가 달라진 건지 콕 집어 말할 수 없었다. 립스틱을 발랐나? 아니면 볼터치를 했나? 그런데 막상 가까이서 보면 맨얼굴이나 다름없었다. 그저 피부 속에서 무언가가 은은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봄날에 땅바닥에서 촉촉한 새싹이 나오듯, 자연스럽게 말이다.
"이 원장, 퇴근 시간 되면 막 날아다니네?"
박윤나 원장이 창가에서 중얼거렸다. 은성이 한의원을 나서는 뒷모습을 보면서였다. 긴 치마 자락이 바람에 살짝 날렸다. 걸음걸이에 탄력이 있었다. 발끝이 땅을 가볍게 차고 나가는 것 같았다.
3년. 민호가 떠난 뒤 은성은 말린 미역처럼 바스러져 있었다. 점심시간에 혼자 앉아 창밖을 보던 그녀의 옆모습은 투명했다. 햇빛이 그대로 통과할 것 같았다. 동료들이 건네는 말에 그녀가 지었던 웃음은 대충 접힌 종이만큼 억지스러웠다. 회식 자리에서 그녀는 항상 구석에 앉았고, 맥주잔을 든 채로 멍하니 있다가 슬그머니 사라지곤 했다.
그 모습을 알던 박윤나 원장은 현재의 은성의 모습이 의아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어떤 계기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갈라질 정도로 건조하지 않았다. 분명 그 계기가 그녀에게 생명을 다시 준 것이다.
퇴근길 지하철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은성은 가만히 들여다봤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무작위로 자신의 얼굴을 보았을 때 이렇게 표정이 부드러워진 게 언제부터였을까.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6시 15분. 곧 집에 도착한다.
그녀는 가방 속에서 작은 거울을 꺼내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러다 문득 씁쓸한 듯 웃었다. 자유자재로 모습을 변하는 호랑이와 동거 중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은 덮어두고 그저 설레는 마음이라니. 무언가에 홀려 정신 못 차리는 자신의 그릇을 새삼 깨달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호랑이든, 뭐든, ‘민호’가 집에 있다. 그녀는 가방 속에서 립스틱을 꺼내 입술을 좀 더 붉게 칠했다.
호랑이에게 낮은 길었다.
은성이 나간 뒤의 집은 시간이 다르게 흘렀다. 천장의 형광등이 희미하게 웅웅거렸다. 냉장고가 간헐적으로 돌아가는 소리. 어디선가 물 떨어지는 소리. 그 모든 소리들이 정적을 더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하늘과는 완전히 다른 주변 소음들이 호랑이의 귀를 간지럽혔다.
호랑이는 인간계를 더 알기 위해 텔레비전을 켰다. 아침 드라마에서 누군가 울고 있었다. 채널을 돌렸다. 홈쇼핑에서는 압력솥을 팔고 있었다. 또 돌렸다. 동물의 왕국. 시베리아 호랑이가 눈밭을 걷고 있었다. 발자국이 깊게 패였다. 카메라가 호랑이의 눈을 클로즈업했다. 황금빛 눈동자가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먹이였을까, 적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끝없이 펼쳐진 설원이었을까. 나와 같지만, 나와는 다른 저 호랑이는 무엇을 위해 걷고 있을까?
호랑이는 이내 텔레비전을 껐다. 거실 바닥에 드러누웠다. 오후 두 시쯤, 햇살이 베란다 유리창을 통해 비스듬히 들어왔다. 따뜻했다. 몸이 나른해졌다. 눈을 감았다가 떴다가를 반복했다. 그러다 문득 천장의 한 점을 응시했다. 형광등 커버에 죽은 나방 한 마리가 붙어 있었다. 모든 것이 다 정적이다.
지겨웠다. 악귀 퇴치 명령이 오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이렇게 지겨울 터였다. 나갈까, 싶었다. 하지만 나간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혹시 나간 사이에, 은성이 집에 불쑥 올 수도 있었다. 그걸 놓치기는 싫었다. 호랑이에겐 지금 동업자와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하늘계에서는 이런 적이 없었다.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것. 시간을 의식한다는 것. 형누나들은 항상 어딘가에 있었고, 부르면 왔고, 가면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혼자였다. 이 네모난 공간에 오롯이 혼자. 이 모든 것이 일종의 수행일까?
세 시가 되자 호랑이는 부엌으로 갔다. 물을 마셨다. 컵에 물을 따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은성이 아침에 쓰고 간 머그컵이 싱크대에 놓여 있었다. 립스틱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호랑이는 그 컵을 들어 찬찬히 살펴봤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설거지를 했다. 립스틱 자국이 지워졌다.
네 시. 호랑이는 은성의 방 앞에 섰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저 문틈으로 보이는 것들을 바라봤다. 침대 위에 대충 개어놓은 이불. 베개가 비스듬히 놓여 있었다. 은성의 체온이 아직 남아있을 것 같았다. 화장대 위의 작은 병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아침마다 은성은 저것들을 하나하나 얼굴에 발랐다. 저것들을 관찰하고 싶었다. 하지만 절대 들어가지 않았다. 그건 동업자를 위한 배려라고 생각했다.
여섯 시. 호랑이는 현관 앞 복도에 앉았다. 왜 여기 앉아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냥 이 시간이 되면 몸이 저절로 이곳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소리. 멈추는 소리. 문이 열리는 소리. 하지만 은성의 발걸음은 아니었다. 은성의 발걸음은 달랐다. 약간 빠르면서도 가벼웠다. 특히 집에 가까워질수록 리듬이 바뀌었다. 타닥, 타닥, 그러다가 타다닥.
여섯 시 반.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호랑이의 귀가 쫑긋했다. 그 리듬. 타닥, 타닥, 타다닥. 가슴 어딘가가 간질거렸다. 호랑이는 '민호'의 얼굴로 변했다. 문 앞에서 잠시 멈추는 소리. 키패드가 규칙적으로 울리는 소리.
문이 열렸다.
"왔어요?"
"네. 나 왔어요."
은성이 신발을 벗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피곤하다는 한숨이 아니었다. 뭔가 안도하는 듯한, 드디어 도착했다는 듯한 그런 숨이었다. 가방을 소파에 툭 던지고는 기지개를 켰다.
"오늘 환자가 많았어요. 할머니 한 분이 계속 말씀을 하셔서 끊을 수가 없었네. 아이고, 피곤하다." 은성이 말하다 말고 웃었다.
"근데 왜 여기 앉아있어요? 거실에 있지."
"그냥 여기가 앉기 좋아서요."
호랑이는 거짓말을 했다. 사실은 기다렸다고, 은성이 오기를 기다렸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이 왜 그렇게 이상하게 느껴지는지 몰랐다. 그니까, 조금 부적절하다고 느껴졌다. 은성이 동업자이긴 했지만, 아직 한번도 동업을 해보지 않은 상태에선, 동업자라고 막무가내로 친근함을 표현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느껴졌다.
은성은 호랑이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부엌으로 가서 물을 마셨다. 호랑이는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하루 종일 일하고 온 은성의 어깨가 약간 처져 있었다. 머리카락 몇 가닥이 목덜미에 붙어 있었으나, 은성의 몸을 건드려선 안 될 것 같아 가만히 두기로 했다.
"저녁 뭐 먹을까요?"
은성이 냉장고를 열며 물었다.
"아무거나 좋아요!"
"아무거나는 없어요. 뭐라도 골라야지. 아무거나는 한국인이 제일 싫어하는 말인데." 은성이 뒤돌아보며 웃었다. 그 웃음이 호랑이의 가슴 어딘가를 건드렸다. 따뜻하고도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은성이 웃을 때마다 호랑이는 찌릿한 기분이 들었다.
은성은 어느 날, ‘민호’에게 뭐라고 부르면 되는지를 물어봤다. 일상을 점점 같이하다 보니 서로를 부를 일이 많아졌고, 애매하게 저기, 저, 이러면서 부르던 둘은 이제 공식적으로 호칭을 정해야만 했다. 은성은 호랑이에게 이름을 불러달라고 했다. 호랑이는 처음으로 은성씨, 라고 불렀다. 오장육부가 왠지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호랑이는 본인을 뭐라고 불러달라고 할지 고민이 되었다. 애초에 하늘계에선 서로를 부르지 않는다. 누가 나를 원한다면 몸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계에선 굳이 호칭을 정해야 한다. 호랑이라고 불러달라고 하기엔, 본인은 땅에 존재하는 호랑이와는 차원이 다른 몸이었다.
은성은 골똘하게 고뇌하는 호랑이가 꽤 귀여웠다. ‘민호’와 민호는 얼굴만 같고, 정말이지 모든 게 다 다르다. 사실 그래서 호칭을 정하고 싶었다. ‘민호’라고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이제는 이 호랑이에게 미안해지고 있었다.
“하늘계에서는 이름 같은 게 없거든요. 그래서 엄청 고민하게 되네요? 앞으로 은성씨가 나를 뭐라고 부를지 정하는거니까...뭔가 멋있으면서도 너무 특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고….”
“네…. 천천히 생각하세요….”
“저는 악귀를 무찌르는 호랑이잖아요.”
“악귀...왜 그 얘기가 안나오나 했네... 아니, 그러고 보니까 왜 악귀 무찌르러 안 가요? 이렇게 근무 태만이어도 되는 거예요?”
악귀를 무찌르러 갈 마음은 오히려 은성이 없었다. 사람으로 변하는 호랑이는 믿어도, 악귀 이야기는 정말이지 신뢰가 가지 않았다. 악귀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그녀는 그냥 ‘민호’가 좋았으니까 같이 사는 거였지만, 그래도 가끔은 이렇게 악귀 타령을 하는 ‘민호’를 괴롭히고 싶었다.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의뢰를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거짓말 아니죠?”
“아니라니까요! 지금 이렇게 은성씨랑 교감하고 생활하고 이런 게 다 악귀랑 같이 싸울 때 도움이 될 거예요. 은성씨도 저를 잘 파악하시고, 전투할 때 저를 잘 다뤄주세요.”
다룬다라...은성은 건장한 남성이 본인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불편했다. 은성 또한 건강한 여성이다. 건강한 성인남녀가 사랑하는 감정이 없어도 한 공간에 같이 있으면 원래 사달이 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심지어 은성은 본인이 너무나 잘 알고, 좋아하는 육신과 같이 있다. 신성한 호랑이는 불순한 의도가 없겠지만, 은성은 때때로 호랑이의 말이 중의적으로 들려 힘들기도 했다. 진정한 악귀는 은성 본인에게 있는 것 같아 참으로 부끄러워졌다. 그런 그녀에게 브레이크가 필요했다. 상대방은 신성한 호랑이라는 것을 계속 누군가 주지시켜 줘야만 했다.
“신성한 호랑이! 신호 어때요, 신호?”
“신호…? 저는 그럼 신호씨가 되는 거예요?”
“그…. 그렇죠! 신호씨. 신성한 호랑이니까 신호...하하...”
“좋은데요? 뭔가 신 같기도 하고요. 마음에 들어요!”
이제 ‘민호’가 아니라 신호가 된 호랑이는 은성 앞에서 활짝 웃었다. 그 웃음이 참 맑고 깨끗해서 은성도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