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견딜만한 여름
동거한 지 한 달이 지나면서, 두 사람 사이에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하나둘 생겨나고 있었다.
8월의 어느 오후, 아스팔트가 녹아 내릴 것만 같은 무더운 날이었다. 뉴스에서는 올여름 최고 기온을 경신했다고 떠들어댔고, 길거리의 강아지들도 모두 그늘을 찾아 헥헥거리고 있었다.
신호는 거실 바닥에 대자로 뻗어 엎드려 있었다. 평소의 의젓하고 단정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얼굴이 벌게진 채 헥헥거리는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에어컨을 최대로 틀어놨지만, 여전히 덥다는 듯 바닥에 배를 대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신호씨, 많이 더워요?"
"네…. 너무 더워요."
신호의 대답이 평소보다 힘이 없었다. 은성은 그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하늘에서 내려와 자유자재로 변신을 할 수 있는 호랑이가 더위 앞에선 이렇게 무력해질 줄이야. 그 장면이 꽤 재밌으면서도 이대로 가만 놔둘 수는 없어서 자연스럽게 냉동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은성은 냉동실에서 아이스팩을 꺼내 깨끗한 면 수건에 감쌌다. 너무 차가우면 안 될 것 같아서 한 겹 더 감싸고, 혹시 물이 샐까 봐 가장자리도 꼼꼼히 접었다. 그러고는 엎드려 있는 신호의 목에 슬쩍 얹어 주었다.
차가운 것이 목덜미에 닿자, 신호는 "아…."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에 금세 편안한 표정이 번졌다. 뺨이 붉게 익은 신호는 은성을 올려다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한국 여름이 악명이 높아요. 수고하네, 신호씨."
"아...은성씨 덕분에 살겠다. 고마워요. 은성씨는 안 더워요?“
“네, 저는 더위 잘 안 타요. 저는 여름을 엄청나게 좋아해요. 온 세상이 초록빛인 것도 좋고, 더워서 몸이 나른해지는 것도 좋고, 맛있는 과일들이 한가득한 것도 좋고, 길거리에 매미가 공짜로 연주해 주는 것도 좋고…. 저는 여름이 적성에 맞나봐요.”
신호는 은성의 이야기에 집중하며 아이스팩을 목에서 이마로, 이마에서 뺨으로 옮겼다. 신호는 여름이 싫었다. 온 세상에 벌레가 들끓고, 더워서 몸이 축 늘어지고, 고기는 금방 상하며, 매미 소리는 귀에 거슬렸다.
하지만 여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여름이라서 은성이 아이스팩을 챙겨주기도 했고, 여름이라서 은성의 쭉 뻗은 다리를 항상 볼 수 있었고, 여름이라서 은성의 피부가 더 윤기 나게 익어갔다. 그리고 은성이 여름을 좋아한다. 신호는 어쩌면 여름을 좋아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밤이 깊어져 갈 무렵이었다. 열대야 현상이 심해서인지, 인간계에 적응하기가 어려운 건지, 은성은 신호가 요즘 잠을 설친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새벽 두세 시쯤 되면 신호 방에서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고, 아침에 일어난 신호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역력했다.
여름을 좋아하는 은성에게도 힘든 여름밤이었기에, 신호에게는 이 여름밤이 얼마나 꿉꿉하고 답답할지 가늠이 안 갔다. 에어컨을 최저 온도로 켜봐도 신호에게는 충분치 않은 듯했다. 심지어 영문도 모른 채 하늘에서 내려와 이 고생을 하고 있으려니, 아무리 신호가 씩씩하더라도 집단에서 쫓겨나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 없을 것 같았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호랑이는 추위에 강하고, 더위에 취약하다고 했다. 어쩌다가 더운 8월에 한국에 와서 이 고생을 하는지…. 은성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조용히 휴대폰을 꺼내 유튜브를 켰다. '자연의 소리'라고 검색하니 수많은 영상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에서 제목에 '호랑이'가 들어간 것을 골라 재생해 봤다.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꽤나 들을 만한 베이스 리듬에 새소리와 바람 소리,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섞여 나왔다.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동물들의 울음소리. 호랑이의 낮은 울음소리도 간간이 섞여 있었다. 이거라면 신호가 조금은 편안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은성은 휴대폰 영상을 재생한 뒤, 볼륨을 최대한 작게 줄이고 신호 방문 앞에 살며시 두었다. 너무 가까우면 들킬 수 있으니까 살짝 멀리, 하지만 소리는 들릴 수 있는 적당한 거리에. 그러고는 길고양이처럼 후다닥 은성의 방으로 도망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호 방안의 뒤척임이 잠잠해졌다. 그리고 얕게 코 고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은성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깊은 잠에 빠졌다.
다음 날 아침, 신호가 부엌에서 휴대폰을 내밀었다.
"이거 은성씨가 해준 거예요?"
화면에는 아직도 자연의 소리가 재생되고 있었다. 짹짹거리다가, 으르렁거리다가, 시냇물 소리가 흐르다가... 은성의 휴대폰 배터리는 거의 다 닳아가고 있었다.
"어, 그거..." 은성이 살짝 민망해하며 고개를 긁었다. "그거 효과 어땠어요?"
"푹 잤어요. 오랜만에 꿈도 안 꾸고 깊게 잤어요. 진짜 하늘계에서 자는 것 같던데요?"
신호의 눈이 반짝였다. 신호는 부엌에서 보리차를 따르고 있던 은성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제가 잠 못 자는 거 알고 있었어요?"
"네... 새벽에 뒤척이는 소리가 가끔 들려서."
"걱정됐어요?"
"그렇죠... 아무래도 낯선 곳에서 지내게 되면 원래 다 좀 슬퍼지고 잠 못 들고 그러잖아요. 친한 친구들도 없고, 가족도 없고, 외로울 거 같아서요."
은성은 왠지 부끄러워져서 휴대폰을 충전기에 꽂아야 한다는 핑계를 대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신호는 그런 은성의 뒷모습을 꽤 오랫동안 바라봤다. 자신의 잠 못 이루는 밤을 은성이 알아채고 있었고, 그녀는 그것을 해결해주기 위해 이런 섬세한 배려를 해주었다.
신호는 은성이 동업자로서 정말 최고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신했다. 그날 밤부터 신호의 잠자리에는 자연의 소리가 항상 함께했다. 그리고 은성도 덩달아 그 자연의 소리가 있어야만 편하게 잠들 수 있게 되었다.
엄청난 무더위가 한풀 꺾인 어느 날이었다. 은성이 퇴근을 하고 현관문을 열자, 신호가 현관에서 조금 어색하게 서 있었다. 무엇인가를 등 뒤로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어요? 왜 그렇게 어정쩡하게 서 있어요?"
"음... 이거요."
신호가 머쓱하게 등 뒤에서 꺼낸 건 조금 시든 분홍 장미꽃 수십 송이였다. 꽃잎 끝이 살짝 말라 있고 줄기도 조금 굽어있었지만, 그래도 예쁜 색깔을 유지하고 있었다.
바로 전 날 밤 냉장고 주변을 하염없이 맴도는 것을 은성은 알고 있었다. 은성은 냉장고 앞에서 생각에 빠진 신호를 보며, 배가 많이 고픈건가, 어디 가서 멀쩡한 닭이라도 잡아 오려는 건 아닐지 걱정했었다. 그런데 웬걸? 신호는 어디선가 멀쩡한 장미를 뜯어왔다.
"어디서 났어요, 이거?"
"공원에서요. 은성씨가 장미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은성은 당황스러웠다. 며칠 전 환자에게서 받은 장미꽃 엽서를 냉장고에 붙여놨는데, 그걸 보고 자신이 장미를 좋아한다고 단정 지었나 보다. 어젯밤 신호가 냉장고를 서성이면서 장미꽃 엽서를 뚫어지게 보고 있던 것이라고 생각하니 은성은 풉- 웃음이 나왔다. 그 순진한 착각을 누가 미워할 수 있겠는가.
"신호씨. 근데 공원에 핀 꽃은 사실 따면 안 돼요. 공원에 오는 사람들 보라고 심어 놓은 거라서, 누가 뜯어가면 혼나거든요."
신호의 표정이 순간 풀이 죽었다. 어깨도 살짝 축 늘어졌다.
"하지만..." 은성이 장미를 조심스럽게 받아들며 미소 지었다. "어차피 신호씨 모습은 아무도 못 보니까, 이번 한 번은 저도 모른척할래요. 장미꽃 너무 예뻐요. 꽃병에 꽂아놔야지~"
"진짜요? 은성씨 기분 좋아요?"
"진짜요. 기분 너무 좋아요. 다음엔 꽃집 같이 가볼까요? 거기서 장미 엄청 많이 사와서 또 꽂아놔요, 우리."
풀죽었던 신호의 얼굴이 다시 환해졌다. 입꼬리가 쭉 올라가게 활짝 웃는 신호가 장미꽃만큼이나 화사하다고 은성은 생각했다.
그날 밤, 은성은 약간은 시들었지만, 여전히 싱그러운 장미를 길쭉한 유리병에 꽂아 거실 테이블에 두었다. 달빛을 받은 장미가 은은하게 반짝였다. 더는 시들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 후로도 자꾸만 작은 일들이 쌓여갔다.
신호는 은성이 9시에 시작하는 드라마를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8시 50분만 되면 드라마 시작 시간을 놓치게 될까봐 안절부절못했다. 혹시라도 그 시간에 은성이 거실에 나타나지 않으면, “은성 씨!”하고 불렀다. 그 목소리에는 묘하게 다급했다. 은성은 왠지 자신을 애타게 찾는 그 목소리가 좋아, 드라마 시작 시간이란 걸 알면서도 일부러 딴 짓을 했다.
어느 날 밤, 방에서 드러누워있다가 목이 마른 신호는 부엌으로 나갔다. 부엌과 가까이 있는 식탁 위엔 물이 담긴 컵이 놓여 있었다. 그 컵은 신호가 평소에 쓰는 컵이었다. 누가 갖다 놨을까. 은성의 방문은 꽁꽁 닫혀 있었지만, 신호는 알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 부엌을 오간 사람이 누군지.
이렇게 말로 표현되지 않는 일들이 그저 일상 속에 스며들었다. 둘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혹은 둘 다 의식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은성은 가끔 신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옆모습, 물을 마시는 뒷모습, 창밖을 바라보는 먼 시선. 그럴 때마다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아직 여기 있구나, 아직 사라지지 않았구나.
신호도 은성을 자주 바라보았다. 책을 읽으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손길, 하품을 하며 눈물이 맺히는 눈가, 스트레칭을 하며 혼자 중얼거리는 입술. 그럴 때마다 몸 안이 따뜻하게 달아올랐다. 이 따뜻함이 무엇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들의 여름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신호가 뜯어온 장미꽃은 며칠 뒤 시들어버렸지만, 그 자리에는 은성이 퇴근길에 사온 새로운 장미꽃들이 대신했다. 결론적으로 테이블 위의 장미꽃은 시들지 않았다.
자연의 소리는 여전히 밤마다 흘러나왔다. 집에서 같은 소리를 들으며 잠드는 밤. 둘은 그렇게 하루종일 연결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