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나의 엄마
미국 고등학교에서 AP를 가르친다는 것은 굉장한 프라이드이다. 특히나 senority를 중시하는 미국의 문화는 절대 새로 들어온 교사에게 AP를 맡기지 않는다. 하지만 교사를 4-5년 한 이후 나에게도 AP를 가르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학교에서 AP를 30년 가르치던 선생님이 이제 은퇴를 하셔야 했기에 그다음 타자로 내가 지목이 된 것이다. 그 선생님은 나에게 모든 노하우를 전수해 주셨고 그렇게 그 선생님과 1년 넘게
co -teaching 한 결과 홀로 AP Calculus BC를 가르 칠 수 있게 되었다. 나름 5년간 모든 과목을 가르쳐봤다고 자부한 나에게 AP calculus BC는 정말 새로운 세상이었다. 일단 용어 자체도 지금까지 가르치던 수학 과목들과는 달랐고 한국말로 해도 못 알아들을 정도의 내용을 영어로 가르친다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난관에 부딪칠 때면 나는 늘 내가 처음 teaching을 시작했던 그 시절을 생각한다. 새벽 1시에 일어나서 스크립트를 작성하고, 그것을 달달 외워서 수업을 하고 너무 지친 나머지 방과 후가 되면 집에 갈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던 나의 그 시절 말이다. 그렇게 5일간 이런 일과를 반복하고 주말에 쉬고 또다시 5일을 반복하고 그렇게 보냈던 나의 처음 1년간의 시간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 시간들은 헛되지 않았다. 이러한 난관이 올 때마다 나는 다시 그때의 모드로 돌아간다. 바닥까지 쳤던 그 시절에 비하면 지금의 모든 상황은 모든 면에서 그때보다 훨씬 낫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상상하는 유복한 유학 생활과 다르게 나의 미국 유학생활은 참 처절했다. 나의 살림은 침대와 책상 그리고 누가 갖다 버린 것을 주워서 거실에 갖다 놓은 브라운관 TV 그리고 1980년도에나 썼을 법한 오래된 컴퓨터가 전부였다. 그렇게 구질구질한 유학 생활 몇 년 을 하고 나서 얻은 것은 돈에 대한 초연함이었다.
경제적으로 바닥을 치던 어느 겨울 나의 통장에는 딱 30불이 전부였고, 돈이 없어서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집에서 일주일을 지내야 했던 그 시절... 아무리 어려워도 그 시절만큼 어려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난 엄마에게 물었다. " 엄마 왜 우리는 미국에 아는 거지도 없어?"라고... 보통 사돈의 팔촌, 육촌, 아는 친구의 먼 친척 정도는 미국에 살지 않던가... 어떻게 나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까 생각했었다. 이럴 때 누군가 나를 좀 도와준다면 조금이나마 힘이 날 텐데라고 생각했던 수많은 순간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교사 되기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엄마 때문이다.
우리 엄마는 나를 포함한 4명의 자식을 키우셨다. 많은 배우지 못한 여자의 몸으로 엄마는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우리 남매 넷을 오롯이 키워냈다. 날마다 고된 일로 힘들지만 자식들을 위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일을 나갔던 엄마... 어릴 적 엄마를 따라 간 새벽 기도에 어깨를 들썩이며, 하나님께 따지듯 물으며 통곡하며 기도하던 엄마... 엄마 된 내가 지금 생각하니 그녀는 우리 4남매를 최선을 다해 키우고 싶은 것이었다. 나의 살이 깎이고, 내 뼈가 상해도, 나는 지금 울어도 내 새끼만큼은 웃게 만들어 주고 싶었던 것이 그녀의 마음이 아녔을까. 나의 그 어떤 어려움도 엄마가 겪었던 어려움과 힘듦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아침이 유난히 힘들 때는 하루도 뺴먹지 않고 일을 나갔던 엄마를 기억하려고 한다. 그녀의 아침은 얼마나 고단 했을까를 생각하면 지금 나는 다시 힘을 내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보낼 이 하루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 엄마는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견뎌냈을지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오늘 나의 이 하루를 헛으로 보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