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S에게 - 등산이 나에게 준 것

우울증 엄마가 열여덟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by 블랙버드

잘 지내고 있니? 요즘 너는 어떠니? 너의 마음, 너의 몸 모두 괜찮니? 너를 아끼고 돌보고 있니?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미래의 너에게 가봐야겠지만 미래의 너를 보느라 현재의 너에게 소홀히 하면 안 된단다. 마음이 미래에 가있으면 불안이, 과거에 가있으면 우울이 오거든. 지금을 살지 못하면 자기 자신이 지워지게 돼. 그런 이유로 세상의 모든 현자들이 ‘지금, 여기'에 존재하라는 말을 하는 것 같아. 영화 <소울>의 '22'가 조 가드너의 몸에 들어갔을 때 장면 생각나? 삶의 목적이 없었던 '22'가 삶을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순간은 부드러운 바람에 떨어지는 메이플 씨앗을 바라볼 때였잖아.


여름 한가운데에서 엄마는 등산모임에 들어갔어. 마음이 힘든 이유를 아는 것 만으로는 치료가 어렵다는 걸 어렴풋이 느낄 때쯤이었지. 몸을 움직이고 건강한 음식을 먹고 좋은 잠을 자는 것이 치료의 85퍼센트를 차지한다는 걸 알았지만 15퍼센트의 다른 치료에 집중해 있느라(과거의 상처를 들여다보느라) 몸을 돌보지 못했어. 몸은 통증으로 신호를 보냈단다. 이대로는 안된다고, 다르게 살아야 한다고.


8월에 갔던 인왕산은 함께 한 모임원들에겐 동네 뒷산 정도의 가벼운 코스였어. 엄마는 전문산악인처럼 등산화를 신고 등산 스틱을 양손에 들고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사람들은 엄마의 과한 복장을 보고 웃었단다. 산을 오르는 내내 엄마는 제일 끝에서 숨을 헐떡였고 오르다가 쉬다가 또 오르기를 반복했어. 그 많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너무 힘이 들었어. 집에 가고 싶었어. '내가 왜 등산을 한다고 했을까?' '뒤돌아서 그냥 갈까?' '먼저 가라고 하고 몰래 집으로 가버릴까?' 엄마는 그때 포기에 대한 생각만 했던 것 같아.


인왕산의 계단들을 보았을 때 ’ 내가 저만큼을 가야 한다고?' 하면서 숨이 턱 막히더라. 도저히 할 수 없을 것만 같았거든. 앞으로 올라가야 할 수많은 계단에 압도되어 버렸고 발이 땅에서 떨어지질 않는 거야. 다행히 엄마가 힘들어할 때 사람들은 다 같이 기다려 줬고 그게 큰 힘이 됐어. 누군가에겐 동네 뒷산인 인왕산 등산은 그렇게 무사히 끝이 났지만 이후 두 달 동안 모임에 가지 못했어. 무서웠어. 이 몸으로 또 산을 오를 수 있을까? 다른 사람에게 민폐가 되지 않을까?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가는 곳이 너무 멀다는 핑계, 몸이 아프다는 핑계, 산에 가지 않을 핑계는 수도 없이 많았어. 살려고 하는 마음과 포기하려는 마음이 싸우는 것을 엄마는 무력하게 지켜봐야만 했어.


다시 등산을 할 수 있었던 건 가까운 거리와 비교적 쉬워 보이는 코스 때문이었어. (상암동 하늘공원과 노을공원을 갔거든) '이 정도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엄마를 움직였단다. 작은 성취의 경험이 뭔가를 계속하도록 만든다는 말이 맞았어. 그 작은 성취가 처음엔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그게 쌓이고 쌓여서 나를 지탱하는 기둥이 된다는 걸 이후의 등산을 통해 조금씩 느낄 수 있었어. 엄마는 생각을 바꾸게 됐어. '하는 게 중요하다. 잘하고 못하고 보다 계속하는 게 중요하다.' 일단 시작한 나를 칭찬해 주기로 했지.


올라야 할 계단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보지 않으려고 애를 썼어. 그때부터였지. 숨이 차고 힘이 들 때면 그저 발 밑을 보자고 생각했던 게. 다른 사람보다 늦는다고, 그동안 자기를 방치했다고 탓하고 싶지가 않았어. 자기를 돌보기 위해 산에 온 거잖아. ‘내 속도로 가자. 일단 한 발을 계단 위에 올리자.‘ 그렇게 생각하니까 신기하게도 덜 힘들고 올라갈만한 거야. 다른 생각은 다 지우고 한 발에만 집중했어. 그다음 한 발, 또 그다음 한 발, 한 계단 또 한 계단. 그러다 보니까 어느새 정상에 도착해 있었는데 아름다운 억새밭이 눈에 들어왔고 기분이 정말 좋았어. 정상을 꼭 정복하고야 말겠다는 마음은 고귀한 마음이야. 그게 살아갈 힘을 주기도 해. 하지만 삶은 정상에 오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더 중요한 뭔가가 있다는 걸 힘겹게 계단을 올랐던 엄마의 발이 알게 해 줬단다.


어떤 날은 길을 잃을 수도 있어. 중간에 내려와야만 할 수도 있고. 좋아 보였던 산이 막상 올라보니 별로일 수도 있고.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또 올라야 할 '봉우리'가 있을 수도 있고. 아직 오를 산을 정하지 못해서 마음이 쫓길 수도 있을 거야. 오르려고 하는 산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느라고 자칫 잘못하면 자기를 잃어버리는 실수를 할 수도 있어. 산으로 데려다줄 내 발과 다리, 그 다리를 움직이게 하는 뇌와 심장, 그리고 나를 지지하는 마음, 언제나 그것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해. 그 들으려는 노력이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란다.(엄마는 그걸 아프게 깨달았어.)


너의 몸과 마음은 계속 산을 오를지, 멈출지, 쉬게 할지 너에게 메시지를 줄 거야. (감정으로, 몸의 증상으로) 엄마가 한발한발에 집중하며 산을 올랐 듯 너도 너의 마음과 몸의 소리에 집중하면서 너만의 산을 올라갔으면 해. 힘들 땐 그저 발밑을 보면서 하루하루를 버텨내겠지만 떨어지는 나뭇잎과 따스한 햇살을 느낄 때면 잠시라도 행복하길… 산길 위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서로의 손을 잡아주며 함께 걸어가길… 엄마는 네가 힘든 것도 행복한 것도 모두 다 생생히 느끼며 ‘지금, 여기’에 살아있길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란단다.



PS. 험준한 산에는 베이스캠프가 있어. 엄마는 너의 베이스캠프가 되어 줄 거야. 힘들 땐 언제든 와서 숨을 고르렴. 잘 쉬고 잘 먹고 잘 자면서 에너지를 충전하렴. 이제는 엄마에게 그걸 해줄 수 있는 힘이 생겼어.


영화 <소울>의 마지막 장면

조 가드너의 영혼이 다시 자기 몸을 찾아갈 때

“이제 앞으로 뭘 할 건가요? 인생을 어떻게 보낼건기요?“

라고 제리가 물었고 조는 이렇게 말했어.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건 알아요.

나는 내 삶의 매 순간을 살아갈 거에요.“



인왕산 등산 - 쉬어가다가 만난 남산타워


전문 등산화와 등산스틱



맨 뒤에서 구부정하게 서있는 게 엄마야.


노을공원 계단 올라가며 만난 한강 풍경


하늘 공원 억새가 석양과 함께 정말 아름다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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