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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진서 Jul 29. 2021

거지를 돕는 이유

<만족 없는 삶에 던지는 21가지 질문, 철학의 힘>



책 표지에 '한국의 마이클 샌델, 김형철 교수'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습니다. 저는 이 표현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제2의 누구', '아무개의 환생'같은 것들이죠. 제2의 BTS, 마이클 잭슨의 환생이 그 예입니다. 이런 수식어는 아직 영향력이 미미하나 가능성 있어 보이는 무언가에 붙곤 합니다. 이들은 대개 반짝 주목받고 사라집니다. 흔히들 '역시 원조는 못 이기지'라고 말하는 이유죠.


출판사는 마이클 샌델 교수가 가진 인지도를 이용하고 싶었을 겁니다. 이 책이 제2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었겠죠. 저는 괜히 <철학의 힘>이 마이클 샌델 앞에서 한 수 접고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달가운 느낌은 아니네요.


이 책의 장점은 철학의 문턱을 낮게 만들어준다는 것입니다. 일반인인 저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요. 친절하고 즐거웠습니다. 더불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를 수 있었습니다. 21가지 질문에 답하다 보면 어느새 자신을 더 깊게 이해하게 됩니다.





정의의 정의


"개인 간의 올바른 도리. 또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


정의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습니다. 무슨 뜻인지 와닿으시나요? 저는 정의란 사회 구성원 모두가 힘써 지켜야 하는 규범 정도로 여겼습니다. 다들 정의로운 사람이 되고 싶어 하니까요. 더불어 우리는 공정한 사회에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정의로움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 걸까요? 이솝 우화 하나를 가져왔습니다.

(편의를 위해 조금 각색했습니다. 원래는 "Lion's share"로 사자가 등장합니다.)



숲의 주인, 호랑이가 죽었습니다. 그 아래로 늑대, 여우, 사슴이 있었죠. 평화주의자 호랑이의 통치 하에 이들은 사이좋게 잘 지냈습니다. 하지만 이젠 새로운 규칙을 세워야 했죠. 세 동물은 한데 모여 의견을 나누기로 합니다.



- 늑대: "내가 개울가에서 지낼 테니, 너네는 바위산과 모래사장을 나눠 가져."


- 사슴: "바위산은 숨을 곳이 없고, 모래사장은 먹을 풀이 없는걸? 원래 하던 것처럼 공정하게 나눠야지."


그러자 늑대는 사슴을 잡아먹었습니다. 피 묻은 입을 닦은 늑대가 여우에게 묻습니다.


- 늑대: "네가 바위산이랑 모래사장 모두 쓰는 게 어때? 난 개울가 하나, 넌 나머지 둘. 공평하지 않니?"


- 여우: "네 말이 맞아. 그렇게 하자."


- 늑대: "넌 참 똑똑하구나? 이게 옳다는 걸 언제 알게 됐니?


- 여우: "조금 전에."



정의가 순식간에 뒤집어졌습니다. 많은 사람은 정의가 꼭 지켜져야 하는 사회적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정의는 강자가 만들어낸 일종의 '개념'일 뿐입니다. 여우가 목격한 것처럼 말이죠.


극단적인 예로 6.25 전쟁을 들 수 있습니다. 인민군이 마을에 쳐들어오면 주민들은 김일성을 찬양합니다. 살아남기 위해서죠. 국군이 다시 마을을 되찾으면 민주주의를 찬양합니다. 역시 살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인민군이 내려오면 공산주의가 정의가 되고, 연합군이 승리하면 민주 정치가 정의가 됩니다. 정의가 뒤바뀌는 동안, 수많은 사람이 반동분자로 내몰려 학살당했죠. 정작 이들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칼 마르크스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관심도 없죠. 이들은 그저 평화롭게 살고 싶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정의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요? 바로 강자입니다. 여기서는 미국과 소련이 되겠네요. 정의는 이토록 제멋대로입니다. 정의 내릴 수 있는 개념이 아니죠.


지금 우리 사회의 강자는 누구일까요?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의란 다수의 의견입니다. 국회의원이 비리를 저지르면 어느 때보다 신한 비판을 받습니다. 대한민국의 대다수인 국민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를 두고 정의롭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물론 비리는 실제로 떳떳하지 못한 행위입니다. 모두에게 주어져야 할 기회를 돈과 권력으로 빼앗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내가 속한 공동체의 정의가 무엇인지 고민해봐야 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정의는 무엇인가요? 그 정의는 누구에게 가장 이로운가요?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 약자의 자유를 잡아먹고 있진 않나요? 미국과 소련처럼 말입니다. 어쩌면 내가 다수의 의견에 휩쓸리고 있는 중일지도 모릅니다. 아니다 싶은 것도 다수가 좋다 하니 고개를 끄덕여 왔던 거죠. 정의란 무엇인가, 한번 생각해봅시다.





거지를 도와주는 이


저는 노숙자에게 직접 적선한 적이 없습니다. 무섭고 낯설기 때문입니다. 겉모습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겠지만, 자연스레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 같네요. 구세군 자선냄비에는 기부한 적이 있습니다. 돈을 넣고 나니 묘한 훈훈함이 가슴속에서 피어올랐죠. 마치 좋은 일을 한 것만 같았습니다.


내가 거지에게 돈을 준 것은 그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네. 돈을 받고 기뻐하는 거지의 모습에서 나 자신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지.



물론 자신의 즐거움만이 선행의 전부라는 것은 아닙니다. 순수한 선의로 해외 봉사를 떠나는 자원봉사자는 존경받아 마땅합니다. 자신을 희생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런 그들조차 봉사를 통해 에너지를 얻는다고 말합니다. 선행을 통해 스스로 기쁨을 느끼는 겁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누구든 선한 행위로 타인에게 존경을 받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적선하며 "이러면 내가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좋다."라고 말하면 주위의 시선이 어떨까요? 곱지만은 않을 겁니다.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사람으로 비치기 십상이죠. 사실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이를 솔직히 표현한 것뿐인데 말입니다.





성찰하는 삶


성찰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우리는 직원을 부려먹는 사람을 악덕 사장이라고 합니다. 중범죄자는 흉악범이라 칭하고 악랄하다고 말하죠. 외에도 악질인 사람, 악마 같은 사람, 악독한 사람 등등... 이렇게 보니 사회엔 나쁜 사람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재밌는 건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도 '악'자를 쓴다는 겁니다. 우리는 비양심적인 행동을 두고 고민할 때 '내 안의 악마가 깨어날 뻔했다.',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갈 뻔했다.'라고 말합니다. 마치 다른 누군가가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든 것처럼 이야기하죠.


정말 누군가 꼬드긴 것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이런 말자기 내면에 존재하는 '악'을 무의식 중에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는 타인을 악하다고 말하며 그들과 나 사이에 은근한 경계를 긋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악해질 수 있음을 알죠. 선악의 경계는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 안에 있습니다. 그 경계를 정할 수 있는 자신뿐입니다. 선으로 채울 수도 있고, 악으로 채울 수도 있습니다. 성찰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미국 원주민 사이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양심 다이아몬드'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가슴속에 삼각 모양 다이아몬드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비양심적인 행동을 하면 다이아몬드가 빠르게 회전하며 속을 아프게 합니다. '양심'에 찔리는 것이죠. 하지만 계속해서 양심을 어기면 이 다이아몬드는 닳아 없어지게 됩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끊임없는 성찰만이 내면을 보석으로 만들어 준다는 교훈을 주고 있죠. 재밌지만 한편으론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인생이란 결코 공평하지 않다.
이 사실에 익숙해져라.

빌 게이츠



이 사실에 익숙해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 만큼 보상받길 원하지만, 남이 잘 되는 걸 보면 항상 배가 아픕니다.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데 철학만큼 좋은 도구는 없는 것 같습니다. 철학으로 스스로를 돌아보며 나도 몰랐던 내 욕망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알아갈수록 공평하지 않은 것에 익숙해질 수 있습니다. 욕심을 버릴 수 있게 됩니다. 저 또한 누구보다 욕심이 많습니다. 하고픈 게 넘치는 사람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도 몰랐던 내 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버리는 방법도 알게 됐죠. 여러분의 욕은 무엇인가요? 이번 글로 자신의 욕망을 하나 더 발견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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