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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우둔한 사람의 독서법

by 들풀생각

가끔씩, 주변 사람들이 내게 영어원서를 한 시간 또는 한 달에 얼마나 읽는지를 묻는다.

내 대답은 언제나 똑같다.


한 시간에 한 페이지도 못 읽는 경우도 많고 책 한 권을 다 읽는 데 걸리는 시간은 짧게는 한 달, 길게는 여섯 달도 더 된다.

그렇게 시간을 들여 읽었는데도 이해가 안 되기 때문에 두 번을 더 본다.

적어도 세 번 이상 읽는다.


그렇게 대답하고 나면, 몇 초간 정적이 흐른다.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모두 사실이다. 그래서, 베스트셀러 제목 가운데 한 시간에 아니면 하루에 한 권 읽기 같은 것이 있으면 거들떠도 안 본다.


나는 머리가 둔하고, 글 쓰는 솜씨가 없고, 빨리 깨달아 아는 힘이 모자라고, 혼자 있는 것을 즐기고, 한번 무엇을 하기로 마음먹으면 꽤 오랫동안 굳게 버티고, 스스로를 높이는 마음이 크다.


그래서, 공부하기에 알맞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문제 풀이 식 공부 재주는 영 잼뱅이다. 그래서 그렇고 그런 학교의 학과에서 딱 학사학위만 땄다. 그리고 학점도 그냥 그 모양이다.


나와는 거꾸로, 공부를 좀 한다는 사람들은 외우기를 잘해 그 재주만 믿고 공부를 소홀히 하기도 하고,​

글 솜씨가 좋은 사람은 빠르게 써내는 힘은 있지만 그 내용이 실속이 없고 충분하지 못하기도 하고,​

이해가 빠른 사람은 한번 깨친 것을 대충 넘기고 곱씹지 않으니 깊이가 없는 경향이 더러 있다.


대체로 이런 사람들은 철학과 같은 인문학을 읽을 때처럼 호흡이 길거나 깊이 들여다봐야 하고 여러 번 읽어야 이해가 되는 책을 멀리하기도 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겠지만 내 주변에서는 못 봤다. 내가 발이 좁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내 가까이에는 그런 사람은 거의 없다.


슬기롭지 못하고 머리가 둔하더라도 끊임없이 글을 읽다 보면 지혜가 쌓이고, 막힌 곳이 뚫리면 그 흐름이 매우 크고 넓어지며 마침내 그 빛이 반짝반짝하게 된다고 하니,

부지런히 공부를 해야겠다.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엉덩이로 하는 것이라는 것을 가슴 깊이 새겨야겠다.


그리고 이 주장에 대한 나의 논변을 밝히고자 내가 그 증인으로 나서서 증명을 하려 한다.

2022년 3월부터 읽기 시작한 양창수 교수의 민법 시리즈, 즉 민법 I(계약법), 민법 II(권리의 변동과 구제), 민법 III(권리의 보전과 담보)를 완독 했다.

그리고 David Harvey의 Enigma of Capital을 2월 7일부터 읽기 시작하여 모두 읽었다.

이것 역시 두 번째 읽는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뚜렷한 뭔가가 안 잡히고 어렴풋하기만 하다.

그렇게 되면 또 한 번 더 읽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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