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을 하면서 염두에 두어야 할 가장 중요한 법칙 중 하나는 적자생존의 법칙(The Law of Survival of the Fittest)이 아닐까 한다.
자본이 주입한 논리(무한 생존경쟁=공정한 경쟁, 약육강식)를 아무런 의심 없이 따르며, 이 길로 가려고 끊임없이 자기를 착취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곳에서 동료란, 같은 직장이나 같은 부문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 그냥 경쟁자일 뿐이다.
우리 모두는 학창 시절에 선생의 권위에는 복종을 옆짝과는 경쟁을, 인적평가는 시험성적으로, 더 나아가, 학교에서 배운 입문 과정의 심화과정인 군대생활을 통하여 조직생활과 상급자에 대한 절대복종법을 모두 배웠다. (성과코칭, 긍정적 사고, 목표달성법을 알려주는 자기계발서들도 이 교육과정에 크게 한 몫 한다.)
그렇게 길들여져 사회로 나와서는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일원이 되어 산업의 역군 또는 산업예비군으로 살다가 물리적 내용연수가 끝나기 전에 그렇고 그렇게 된다.
슬프지만 현실이다!
일찌감치 이 구조를 깨우친 나는 나 자신과 경쟁하는 사람이라 여기고 이 굴레에 휘말려들지 않으려 애써왔고 지금도 그렇게 한다. 그럼에도 내가 체험한 현실을 반영하기 위하여 가상 속의 또 다른 나인 The Partial Spectator를 설정해 아래의 이야기를 풀어가려 한다.
The Partial Spectator는 각각의 개인에게 최선의 분배를 결정하는 하나의 인간이 필요하게 되는데, 공평하고 동정심을 가진 관망자인 The Impartial Spectator와 대립되는 가상적 존재
나와 The Impartial Spectator 그리고 The Partial Spectator는 모두 나다.
아래의 이야기는 내가 또 다른 나인 The Partial Spectator를 가짜로 만들어 놓고 혼자서 중얼거리는 속내임을 미리 밝힌다.
오래전에 회사에서 OPIC과 TOEIC Writing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하니, The Partial Spectator가 영문학전공자라 당연하다 한다.
그래서 또 철학을 원서로 읽고 The Economist와 Financial Times를 정독하고 있다고 하니, 그가 또 “그래서 뭐!”라고 그런다.
이번에는 아예 민법과 행정법을 논술로 봐야 하는 자격증을 따고 나서도 모자라 법학과 경제학을 독학으로 하고 있다고 하니, 그가 “백면서생 하지 말라!”며 쐐기를 박는다.
The Partial Spectator가 내가 뭘 하더라도 지적인 영역에서 나를 인정해 줄 생각이 전혀 없다.
이제는 또 블로그나 브런치에 날마다 글을 쓰고 소통하고 있다고 말하면, 그는 또 “시간이 남아도냐?”라고 폄하하겠지.
나의 또 다른 나인 편파적 관망자(The Partial Spectator)이지만 참으로 못났다! 솔직히 부러우면 부럽다 말하지.
나는 그대가 날마다 다른 사람들과 끼리끼리 몰려다니며 골프 치고 술 먹고 이상한 YouTube나 예능프로그램을 보거나 휴대폰으로 게임하며 시시덕거리고 남 헐뜯을 때 혼자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그랬더니 시간이 남아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정말로 시간이 남아도는지를 증명하기 위해 내가 날마다 글을 쓰는 과정을 또박또박 설명하기로 한다.
진달래와 개나리가 지고 벚꽃이 피는 건지 아니면 거꾸로 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자연이라는 것은 인간이 간섭하여 이래라저래라 한 것도 없는데 지들끼리 싸우지 않고 잘도 졌다 폈다 하는구나.
이런 것을 유식하게 자유를 넘어 자율로 일궈낸 사적자치라 하나보다.
사적 자치의 원칙 또는 계약 자유의 원칙이란, 소유권 절대의 원칙, 자기 책임의 원칙(과실책임주의)과 함께 근대 민법의 3대 원칙 가운데 하나다.
다시 말해, 사법상의 법률관계, 특히 거래는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결정되어 자기 책임아래 규율 되는 것이 이상적이며 사적생활의 영역에는 원칙적으로 국가가 개입하거나 간섭하지 않는다는 근대사법의 원칙이다.
인간이 자연보다 얼마나 못났으면 저런 걸 다 골치 아프게 학설로 정립하고 법률에 규정하고 판례로 정립해 놓고도 제대로 못 지키나!
그게 다 이기심(Self-Interest)에 기반한 탐욕(Greed) 때문이겠지.
자본주의(Capitalism) 또는 자본의 운동법칙(The Laws of Motion of Capital)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인간을 끝없는 탐욕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것일까!
혹시, 이 제도의 기반인 자유(Freedom)가 개인주의에 입각한 그런 자유가 아니라 경제적 자유만 강조하는 다시 말해 자유시장(Free Market) 또는 자유무역만(Free Trade)을 우선시하니 그런 것 아닐까?
나만이라도 하루빨리 자본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진정한 자유인이 되어야겠다.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자유인이란,
불교의 무소유(無所有)와 비슷한 “그 어느 곳에도 얽매이지 않는 마음가짐에서, 가진 것이 없이도 모든 것이 있는 그러한 모습”의 인간이다.
거의 날마다 글을 써서 올리니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이 많이 놀란다. 잘 쓰지는 못해도 온갖 힘을 다하여 마음의 소리를 담아 글에 쏟아붓는다.
날마다 집 근처에 있는 자유공원(The Freedom Park)을 두 바퀴를 돌고 한 바퀴는 걷는다. 노는 날에는 공원에 꾸며진 둘레길을 한 바퀴 더 보태며 몸을 움직이는 일을 마친다.
모두 더해 대략 10km 정도 걷거나 달린다.
한 바퀴의 길이는 딱 1,711m인데, 걷거나 뛰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어림잡아 11분 39.03초다. 그리고 둘레길은 이 보다는 짧은데 명색이 산이라 16분 07.04초가 걸린다.
내 나이 40대일 때에는 걷거나 달린 거리가 하루 평균 10km 이상이었는데, 50대가 되고 나서는 8.5km 정도 된다. 40대부터 90대까지 총 내용연수를 5 기간으로 정해서 1 기간마다 20%씩 정률법으로 감가상각을 한다고 가정하면 얼추 맞는 수치다.
가령, 60대에는 6km, 70대는 4km, 80대는 2km 등으로 되겠지.
달리면서 오늘 쓸 거리를 떠올리고 걸으면서 스마트폰 메모장에 옮겨 적는다. 남들은 내가 휴대폰을 보면서 걷는 줄 아는데 사실은 글을 쓰고 있다. 다행히도, 무엇을 쓸 것인가가 정해지면, 무엇이든지 생각나는 대로 막 휘갈겨본다.
나중에 잠을 자기 전이나 하루 중 느닷없이 글을 쓰고 싶어질 때 걸을 때 짤막하게 남긴 글을 꺼낸다. 그리고 엉성한 뼈대에 촘촘한 살을 보탠다. 짬이 날 때마다 그렇게 썼다가 지웠다가를 되풀이하여 마무리 짓는다.
그리고 브런치에 저장해 두었다가 그날그날의 상태에 맞춰 매거진 별로 주제를 맞춰 글을 발행한다. 나름 좋지는 않지만 성실하게 머리를 쓴다.
책 읽기도 글 쓰기도 느긋하게 즐기며 하니 더욱더 하고 싶어 진다.
남들처럼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내가 겪은 맛집과 볼거리를 쓸게 없다. 그래서 나는 글을 읽고 또 읽어 낸 느낌을 나만이 낼 수 있는 소리로 나타내야 한다.
지적 호기심의 충족도 책 읽기도 그리고 글쓰기도 모두 인간의 본성인가 보다.
마치 식욕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