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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주기 식 공부하는 까닭

꼰대가 꼰대를 이기는 방법 (1)

by 들풀생각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우리 주변에 늘 있을 법한 꼰대의 특성을 뽑아내서 따로 엮어 만든 가공의 인물임을 미리 밝힙니다.




브런치나 블로그 그리고 인터넷 서점 여기저기서 직장 또는 꼰대상사로 부터 탈출하는 방법에 대하여 쓴 글들이 많이 보인다.

모두 수동적인 회피법 또는 적극적인 공격법으로 모순의 모순이 생겨 더욱더 큰 부정의 모순이 만들어진다. 급기야는 대립과 갈등의 요소가 확산되어 해결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는 척 더해서 말하면, These-Antithese-Synthese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모순의 내재화와 더 큰 합의(The Internalization of and greater accommodation of the contradiction)’가 필요하게 되어 대립과 모순만 확장될 뿐이다!

간추리면, ‘병의 원인을 찾아 없애기 힘든 상황에서, 겉으로 나타난 병의 증상에 대응하여 처치를 하는 치료법‘인 대증요법(對症療法)을 찾지 말고 인간의 본성에 다가가 본질적인 근원을 없애는 방법을 찾자는 뜻이다.

그래서 나도 이기고 너도 이기고 우리도 이겨서 회사도 사회도 나라도 세계도 그리고 우주도 모두 어울려 아우를 방법을 찾아보려고 이 글을 남긴다.


우리 옛말 가운데, ‘벼 이삭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와 함께 여러모로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 말이다.


내 뜻대로 풀어보자면, ‘벼가 익는다고 해서 억지로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익게 되면 스스로 그러하게 된다!’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말을 잘못 알아 새겨 익지도 않았는데 고개부터 숙이려 한다. 익기는커녕 볏잎이 제대로 자라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래서 잘난 체하며 뽐내고 건방진 마음을 가진 사람들한테 자주 당한다. 특히, 교만한 그들은 주로 남을 낮추어 보거나 남이 하는 일을 하찮게 여긴다.


더 나아가, 그들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은 얕잡아 보지만, 거꾸로 뛰어난 사람 앞에서는 쩔쩔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자본이 주입한 논리인 무한 생존경쟁과 공정한 경쟁 그리고 약육강식이 판치는 사회생활에서는 남한테 자기의 모자란 점을 함부로 드러내서는 안 된다. 이와는 거꾸로, 자기의 잘난 점을 많이 보여줘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제 값을 높이 쳐 받지 못하더라도 함부로 에누리되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나는 일부러 남들에게 보여주기 식 공부를 한다.


매우 효과적이다


날마다 나가는 돈벌이 터 내 자리 옆에 법률학 교과서들을 잔뜩 쌓아두고 있다. 얼추 15권이나 되는데 모두 ‘내돈내산’이다.


민법, 형법, 행정법 그리고 민사소송법과 관련한 책으로 모두 해당 분야의 최고 학자가 저술한 것들이다. 이 자리에는 아무 책이나 오를 수 없다. 적어도 세 번 이상 읽고 나서 내가 다른 사람한테 그 뜻을 잘 밝혀 알릴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런 것들은 반드시 나만의 자국(Signature)을 남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노란빛의 형광펜과 빨간빛의 볼펜으로 그어진 줄이다.


내가 이렇게 하는 까닭이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이 과목에 대한 지적 허영심을 넘어 지적 호기심으로 다다라 마침내 자존감이 최고조로 달했음을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다. 내 카톡과 브런치의 프사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누구든지 이 책의 내용을 물어 오면 언제 어디서라도 바로 대답할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회사생활을 하면서 어디서 결코 해본 일이 없던 법률 관련일을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짜낸 나만의 꾀다. 맨 처음 이런 일을 맡고 선 바깥 둘레의 눈초리가 많이 따가웠다. 문학을 전공한 사람이 저런 일을 하면 얼마나 버티며 잘하겠느냐 하는 눈치다.


나만의 생각일지는 몰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처음 볼 때, 고향과 나이와 학교와 전공을 주로 묻는다.

마치 자기와 견주어 떠 받들어야 할지 낮춰야 할지를 탐색이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소설은 거의 읽지 않지만 제인 오스틴(Jane Austen)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은 무려 세 번 이상이나 읽었다. 그것도 영어원서로 말이다. 세상밖에서 살아보니 작가가 나타내고자 한 뜻이 너무도 가슴깊이 사무친다. 그래서 여러 번 읽고 앞으로도 또 읽어 볼 생각이다.




나는 돈벌이 터에서 법률과 바로 얽힌 일을 두 번이나 해왔다.


한 번은 회사의 부동산 관리와 주주 총회(이사회)를 관리하는 총무업무를 했고 또 한 번은 금융분쟁조정업무를 해오고 있다.

낱낱이 밝혀 말해 보면, 앞의 것은 민법의 물권법과 채권법의 계약파트와 상법의 회사편을, 뒤에 것은 민법의 모든 분야에 더하여 민사소송법 그리고 형법과 행정법의 논리체계를 꿰뚫고 있어야 일하기가 쉽다.


일을 맡은 처음에는 그렇다 손 치더라도, 여러 해를 거쳐 베테랑처럼 서투르지 않게 잘 다루었는데도 가까이 있는 사람들조차도 내 말을 바로 믿지 않는 눈치였다.


하루는 내가 업무 중에 민법의 대리 편 무권대리 규정 판례까지 보여주며 자세히 설명했는데도, 내 말을 듣지 않는 분에게 ‘그러면 네이버에게 물어보자!’고 했다가 갑•분•싸했던 일이 있다.


(내 또래인 그는 Naver를 Neighbour로 잘못 알아듣고 자기를 무시하는 걸로 알았던 눈치였다.)


아마 내가 비전공자라는 점과 자기보다 지적인 수준에서 한 수 아래의 사람이라는 편견과 선입견이 한몫을 했던 것으로 미루어 생각된다. (참고로, 그는 국내 유명대학의 경영학 석사출신이라 스스로 얘기한다.)


이러한 곱지 않은 시선이 쌓이면 싸일수록 내가 여전히 내공이 부족하구나 여기고, 아래 사진의 풀처럼 장마와 홍수가 지난 뒤에 언제 그랬냐는 듯 벌떡 일어나 머리를 꼿꼿이 세우는 기질이 온몸에 박혀있다.


그래서 나의 필명이 들풀이 되었다. 아래가 나의 상징인 들풀이다.



영문학 전공자로서 대한민국 최고의 투자신탁회사에 입사한 날부터 지금까지 늘 들풀로 살아온 삶, 언제 어디서나 늘 고개 들고 당당히 맞이하는 자세를 갖춘다. 회사에 들어온 이후 주식과 채권 그리고 펀드 판매와 관련된 일을 하기 위해 경영학의 투자론과 회계학 그리고 경제학 공부를 혼자 해왔다.


​여러 고민을 한 끝에 사람들의 오만과 편견을 거꾸로 써먹자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무슨 말이나 하면, 나를 그냥 법률 실무 전문가로 겉을 그럴듯하게 꾸미는 일이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그동안 내가 공부한 법학 이론서들을 책상 위에 펼쳐 놓아 오만한 그들이 걸려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다른 그가 우리 부서의 장으로 온다는 소문을 들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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