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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 날, 비 오면 좋았던 까닭

by 들풀생각

오늘은 노는 날, 집에서 쉰다. 금상첨화(錦上添花)로 비까지 온다고 한다. 시골을 떠난 날부터 지금까지 이런 날은 왠지 마음이 푸근해진다. 그래서 꽤 오래 보고 있는 책을 마음껏 펼치며 따져가며 빠져든다.




나는 왜 비 오는 노는 날에 책 보는 것이 그토록 좋을까?


몇 해 전 초등학교 동창회 모임에 내려가, 어릴 때 살았던 동네를 다녀오고서야 마침내 그 답을 찾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이런 날엔 밭에서 일을 하는 대신 마음껏 책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또래 산골 출신의 사람들이 그래왔듯이 봄부터 초겨울까지 노는 날 집에서 공부하는 것은 사치다. 왜냐하면, 언제나 부모님의 모자란 일손을 도우려 조금의 힘이라도 보태야 했기 때문이다.


골에도 면에도 군(읍)에도 나가봐도 온갖 산이고 잘 살고 못 살고의 차이도 거의 없다. 학생들의 성적 수준도 거기서 거기일 뿐인 하향 평준화라 두루두루 다 친하다. 동산과 부동산 그리고 산과 들에 있는 무주물과 또 설사 명인방법을 갖춘 물권이라도 모두 내 것이라 여기기에 소유권과 계약(교환)을 바탕으로 한 민법도 배울 필요도 없고, 사유재산제도를 근간으로 한 자본주의 시스템을 잘 몰라도 사는데 별 지장이 없다.


그래서 이기심과 경쟁으로 얼룩진 탐욕과 물욕도 딱히 없고 의리도 강하고 또 순진하다. 한마디로, 자본이 주입한 논리(무한 생존경쟁=공정한 경쟁, 약육강식)를 아무런 의심 없이 따르며, 이 길로 가려고 끊임없이 자기를 착취하는 노예와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30년 가까이 금융투자회사에 다니지만 주식과 펀드 그리고 대체투자 또는 코인투자를 공부는 하되 직접 투자를 하지 않는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일이다. 아침 일찍 해가 뜨자마자 밭으로 나가서 일을 하다가 은하철도 999를 보려고 꾀를 내었다. 1999년 6월 17일 국제노동기구(ILO) 제네바 연례총회에서 아동노동 착취금지 협정을 체결하기도 훨씬 전에 이 권리를 외치다가 아버지한테 혼났다. 어렴풋한 기억으로 아버지가 엄마한테 일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밥도 주지 말라했던 것이다. 좀 아는 척해보자면 무노동 무임금 원칙(no work no pay)의 적용이리라! 어린 마음에 곡기가 끊긴다는 것의 두려움 때문에 친권자이자 법정대리인인 아버지에게 바로 무릎을 꿇고 싹싹 빌었다. 다시는 그런 불온한 말을 입밖에 내지 않겠다고 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은커녕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도 들어 보지 못한 내가 어디서 그런 객기를 부렸을까? 지금 생각하면 신기하다 못해 기특하기까지도 하다. 어쨌든, 나는 1988년 대입학력고사를 치기 마지막 주 토요일까지도 고추밭의 비닐을 걷어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다음 주부터는 영하의 날씨가 예고되어 땅이 얼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서도 2년간 더 민법상으로 성년의 권한을 행사할 수 없었다.


나중에 서울로 유학하며 알게 된 것은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3학년생들은 그 어디에도 시골의 우리처럼 사는 곳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얼마 전에 같은 동네에 살던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대구에 다녀왔다. 그 집의 자녀들은 모두 7남매였다. 우리 동네가 모두 15 가구였으니 모두 그 친구의 형제자매들과 동창이 아닌 집이 없었다. 지금은 모두가 고향을 떠나 자기가 사는 곳 밖의 다른 고장에 살고 있다. 장례식장에서 2시간 이상을 식사하며 앉아 있으니 동네 사람들 거의 모두를 만난 듯했다.


나이가 가장 많은 형들이 60대 중반이고 가장 어린 동생이 벌써 50대에 들어섰으니 세월이 물처럼 빨리도 흘러왔다. (동네 아재들은 모두 70이 넘었다.)


모두를 반갑게 만나고 KTX로 올라오는 길에 즐겁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너무도 그리움에 사무쳐 이 글을 어딘가에 남겨야만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고향이 내게 준 큰 축복(무소유 정신)에 대한 아주 작은 보답이리라!




내가 어릴 때 살던 동네는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도계 2리 골배골이다.


영양군 일월면 918번 지방도로에서 버스를 타고 가다가 일월면파출소 사거리를 지나 조지훈 선생의 생가인 주실마을로 가다 보면 배골이라는 약 50여 가구가 모여 있는 제법 큰 동네가 나온다. 여기서 버스를 내려 이 마을을 지나 약 3.75km의 꼬불꼬불한 산골길을 들어가야 우리 집이 나온다. 우리 동네에서 가장 막장이다. 우리 집 뒷밭에서 육군 모부대가 혹한기 훈련도 여러 번 했다. 빠른 걸음으로 가면 45분, 보통 걸음으로 가면 1시간 정도 걸린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강원도나 경북, 지리산 인근의 인적이 드문 산간 오지 두메산골 같은 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기원을 타고 올라가면 처음 정착은 화전민으로 시작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 집은 저 멀리 울진에서 뒤늦게 이 마을로 이사를 와서 마을의 가장 안쪽에 터를 잡았다. 우리 밭의 대부분은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산비탈에 위치하여 늘 소를 앞에서 끌며 밭을 갈았다. 소를 끄는 것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 나의 주요 미션이다. 논보다는 밭이 대부분인 것으로 보아 화전이 확실했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호롱불을 켰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우리 집에 도달하려면 동네의 약 15 가구를 거쳐서 지나가야 하는데 집과 집 사이는 어림잡아 짧게는 100m 길게는 300m 정도나 되었다. 버스에서 내리고 큰 마을을 지나서 약 1.5km 걸어가야 첫 번째 집이 나타난다. 이곳까지 도달해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는 길엔 멧돼지, 늑대, 삵과 같은 맹수의 울음소리가 늘 끊이질 않았으며, 길 옆마다 애기나 처녀 묘를 비롯한 갖가지 분묘기지권이라는 물권이 형성되어 있어서 늘 으스스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마을에 들어가기 직전에 마주하는 호랑이 턱걸이 바위라고 하는 곳에 다다르면 거의 녹초가 된다. 마을의 전설에 따르면, 이곳에 호랑이가 내려와 턱걸이를 하고 갔다고 한다. 이곳은 우리 동네에서 한 밤중에 가장 무섭다. 그러나, 낮에는 물놀이터라 아주 아늑한 곳이다.


이 바위 앞에 작은 개울이 있는데 바닥이 넓은 바위라서 낮에는 여기서 동네 애들이 다들 물놀이 하며 논다. 모두 여기서 만나 함께 들어간다.


트럭 1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좁은 길에 급경사가 진 내리막길이라 우스갯소리로 우리 집에서 자전거 페달을 한번 밟으면 버스를 타는 그 마을까지 핸들만 잡고 있으면 될 것이라고도 하였다. 그 대신 집으로 올라올 때는 자전거를 손으로 끌고 가야 하기 때문에 모터가 없는 자전거는 별 소용이 없다.


그 길을 통학하는 데 있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와 함께 다니던 친구들이 읍내에서 자취를 하거나 보충 수업을 하지 않게 되면서 나는 늘 혼자서 그 먼 거리를 걸어 다녔다. 입구의 큰 마을부터 우리 집까지 가로등이 하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한 여름날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비가 오거나 달빛이 없는 날에 보충수업을 마치고 혼자 집으로 가는 날이면 큰 곤욕을 치러야 한다. 밤 10시 30분에서 11시 30분 사이의 일이다. 물론, 플래시를 들고 다니기는 했지만, 늘 등골이 오싹하게 식은땀을 흘리며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다녔던 기억이 뚜렷하게 난다.


고등학교에서 버스로 20분을 타고 또 마을로 들어간다. 그러다 보면 체력이 거의 다 소진하여 집에 돌아가면 평일에는 책을 볼 여력이 나지 않는다. 피곤한 몸으로 자고 일어나 또 꼭두새벽에 버스를 타러 나온다. 그래서 학교 이외에는 책을 볼 공간도 시간도 없는 것이다. 학교 당국에서도 시골의 이러한 농번기 사정을 잘 알기에 토요일 오후나 노는 날에 학교에서 보충수업이나 자율학습을 함부로 운영할 수도 없다. 차라리 학교가 강압적으로 책을 보게 해 주었으면 좋으련만…그 때나 지금이나 부모님들의 입김이 센 것은 매 한 가지다.


아무튼, 이런 경험으로 집안에 책이 잔뜩 쌓여 있고 언제든지 마음껏 책을 보는 TV속 도시인들에 대한무한한 동경심을 가지게 된 것 같다.


사실 대학교 1학년 때 컴퓨터가 있는 친구집에 갔는데 하드 커버로 된 고전 전집이 서재에 가득 있는 것을 보고 너무도 부러워했었다. 그리고 돈을 벌어 언젠가는 나도 저렇게 하리라 굳게 마음을 먹었다. 한때는 CNN과 BBC에 나오는 석학들의 서재를 보고 또 부러워했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러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가진 책의 양과 질도 그들에게 주눅이 들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저들이 읽고 있는 뭐 좋은 원서가 없나 살펴본다.



졸업을 하고 회사를 다니던 어느 날 일요일 아침에 비가 오는데 너무도 푸근했다. 왜 그런 마음이 생겼는지를 궁금해했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독서를 즐길 때가 아니라 그냥 잠을 더 청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뒤늦게 공부에 한이 맺힌 사람처럼 독서에 빠져들며 왜 그럴까 하다가 이제야 실마리를 찾는 듯하다.


그때 그 한 맺힌 마음이 지금껏 나를 끝없는 독서의 길로 이끄는 게 아닌가 한다.


아마, 내 생각이 틀림없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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