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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학위) vs 실력(독서)

홀로 배우는 것의 즐거움 (2)

by 들풀생각


※ 이 글은 직장을 다니면서 공부에 뜻을 두고도 이런저런 형편 때문에 독학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한 목적 (승진, 이직 등)을 위한 학위취득이 아니라면 독서만으로도 얼마든지 자기 공부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학위가 없다고 괜스레 불평하지 말고 책을 읽을 것을 권합니다.​


인생에서는 양질의 독서량과 경험이 곧 학위고 스펙이라고 믿고 삽니다.




원효대사는 의상대사와 당(唐)으로 유학을 떠나던 길 어느 동굴에서 해골바가지의 물을 달게 마시며 ‘세상 모든 것이 마음가짐에 있다!’고 깨닫는다. 그리고, 유학을 접으며 신라로 되돌아가 불교의 대중화를 이끌며 화쟁사상으로 종파의 대립을 해결한다.

​먼발치에서 대사를 흉내 내며 “자본의 물신성과 사대주의 극복의 길”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은 사람이라 처음부터 제도권의 교육을 받을 생각이 따로 없었다.

우리 역사상 비주류로 분류된 학자들이 남긴 훌륭한 저작물을 읽으며 나 자신을 찾아, 바깥세상을 엿보며 시대정신을 꿰뚫고, 내 삶에 맞춤식 공부로 스스로를 다잡는데, 사람의 얼을 쏙 빼며 옭아매는 교육을 받으러 비싼 돈 내가며 학교로 갈 것까지야! ​

몸이 고생해서 그렇지 호미와 괭이(철학+법학+영어)만 가지고도 브런치나 블로그에서 火田(글쓰기)을 일굴 수 있는데…




나는 국부론과 자본론 그리고 정의론을 원서 또는 영역본으로 읽었다. 그것도 여러 차례 읽고 또 읽었다. 입문서도 참고서도 번역서도 모두 읽었다. 그리고 지금도 읽는다. 내용의 이해 여부와 상관없이 자부심이 대단하다. 이 책들을 읽어낸 용기로 인문학문과 사회과학 그리고 자연과학의 대표고전도 여러 차례 읽었다. 그래서 언제 어디에서든 늘 당당하게 산다.


그리고 속으로 우쭐댄다. ‘이거 왜 이래? 나 이런 고전을 읽은 사람이야!’ 재수 없어 보이지만 이것이 바로 나의 독서 최대 효과다. 겪어 보면 그 마음 넉넉히 알게 된다.


내가 이 책들을 읽었던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나도 남들처럼 직장을 다니며 스펙 쌓기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요람에서 무덤까지(from the cradle to the grave) 따라다닌다는 그렇고 그런 학력을 세탁하고 싶었다. 물론, 전공불문으로 말이다. 내 주변에 있는 석•박사 출신 또는 사회과학 전공의 동료들을 유심히 살펴봤다.


영문학을 전공했음에도 대학시절부터 경제학에 관심이 많았다. 조순의 경제학원론부터 3인 공저의 경제학원론까지 이학용의 미시경제학, 정운찬의 거시경제학을 번갈아 가며 끊임없이 읽었다. 독학을 하는 사람들이 겪는 독단 또는 독선 일지는 모르나 경제학은 국부론, 국부론은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내 맘대로 연결 지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이 책을 꼭 읽어 보리라 마음먹었다.


경제학 같은 사회과학 전공자들이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을 어느 정도 공부했는지 궁금했다. 교과 과정에서 따로 배우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 책을 원본은커녕 번역본조차도 읽지 않았다고 했다. 영문학 전공인 내가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를 모르는 것과 똑같았다.


이럴 때는 나도 그들도 변명 늘어놓기 일쑤다. 곧, 그 책과 커리큘럼은 크게 관련이 없고 또 시간도 없는데 굳이 그런 따위를 왜 읽느냐는 뜻이다. 논문을 쓸 때, 국부론의 원본을 읽지 않고 다른 논문을 참조하면 된다고도 했다. 그리고 대부분 그런 고전을 읽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도 경제학의 아버지라던데…


내가 발이 좁아서 그렇지 대한민국 구석구석을 찾아보면 분명히 저런 책을 읽고서 경제학적 통찰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꽤 많으리라. 그냥 그렇다고 막연히 기대한다. 공부를 전업으로 해야 하는 대학원생들도 전공 관련 대표고전을 읽을 시간이 없다고 한다. (이런 내용은 현직 명문대학교 교수인 내 블로그 이웃들이 써 놓은 글을 좀 봤다.) 하물며, 직장을 병행하면서 이것들을 읽을 엄두가 나겠는가?


고학력자들의 독서력에 크게 실망한 나는 그날부터 경제학은 물론 이 땅의 모든 학력 스펙 쌓기에 대한 환상을 버리기로 했다. 다시 말해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고 또 학문을 하는 그런 곳이 아니고 설렁설렁하게 논문 써내고 그냥 돈 주고 학위를 따올 것이라면 굳이 그곳으로 돈과 시간을 쏟아부을 일이 아니라 여겼다.


대신, 전문자격증을 취득한 후 밥벌이 수단을 갖춰놓고 평생에 걸쳐 전공별 대표고전을 모두 찾아 읽으며 독학으로 필요한 지식을 채우기로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상누각(沙上樓閣)이 될 학문적 과업을 치장하고 겉만 번드레한 사람들 앞에서 위용(威容)을 갖추기로 하였다.


그렇게 시작한 독서가 이제 겨우 밖에 내놓을 수준이 된다. 아래는 글쓴이가 임의로 전공별 대표고전을 분류하고 현재까지 읽어 온 도서목록이다. 모두 영어원서 또는 영역본이다. Karl Marx의 저작은 별도의 글에서 모두 언급하였으므로 여기서는 뺀다.


【분야별 대표고전】

정치•경제학(국부론, 자본론, 정의론), 철학(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순수이성비판, 정신현상학), 역사(역사의 연구, 로마제국 쇠망사), 사회•문화(오리엔탈리즘), 법학(법의 정신), 자연과학(종의 기원, 과학 혁명의 구조)





스펙 말고 독서로 내면의 지식 채우기를 결정한 주말에 교보문고로 가서 Adam Smith의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th of Nations를 샀다. 그리고 그날부터 무슨 소리 하는지도 모르고 우직하게 영어 공부라 여기며 읽어 나갔다. 때마침 법학 공부법을 터득한 터라 똑같은 요령으로 도서관에서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으며 공부했다. 법학 교과서를 읽듯이 고전원서도 똑같이 읽어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꽤 오랜 시간을 들여 1 회독을 다 끝낸 소감은 영어 문장이 매우 길고 신문과 잡지에서 보지 못하던 그런 문체가 너무 멋있어서 감격적이었다. 2번이나 3번 읽고 나면 무슨 재미가 있겠지 하면서 계속 우직하게 읽어 나갔다. 그러나 그렇게 읽었음에도 뭐 그다지 재미도 없을 뿐 아니라 글의 내용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Financial Times와 The Economist를 독해하는 데는 크게 도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고급 잡지와 견주어 독해 수준이 훨씬 더 높았기 때문이다.


어디로 가더라도 또 무슨 일을 하더라도 속으로 ‘나는 국부론을 영어 원서로 3번 읽은 사람이요!’라고 외치면 어깨가 쫙 펴지는 게 다였다. (속으로 이런 것이 인문고전 독서의 효과구나 여겼다.) 그러다가 도메 다쿠오가 쓴 ‘지금 애덤 스미스를 다시 읽는다’를 읽게 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국부론만 읽어서는 애덤 스미스의 사상을 온전히 알 수 없기 때문에 도덕 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도 함께 읽어라 해서 또 그렇게 했다.


『도덕 감정론』의 주된 목적은 사회질서를 이끌어내는 인간 본성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이다. 사회질서란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구성원이 어떠한 규칙에 따름으로써 평화롭고 안전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말한다.


이 책은 동감(Sympathy) 또는 공감(Empathy)을 소재로 도덕 감정(Moral Sentiments)을 논하는 것인데 마치 동양의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보는 듯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의 《천주실의(天主實義)》가 스코틀랜드의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준 듯하다. 이 책과 연결 지어 David Hume의 A Treatise of Human Nature도 읽어보게 되었다. 여러 차례 정독했음에도 낮은 지능 탓에 내용의 이해는 거의 되지 못했다.


Adam Smith, David Hume, Edward Gibbon의 작품들은 모두 우려한 영어문장으로 이루어져 지금 읽어도 감동이 그대로 전해진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유려한 명문장은 그 어느 문학작품에 뒤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영국의 저명한 수상인 Winston Churchill이 자서전에서 격찬한 유려한 명문장의 보고(寶庫)인 Edward Gibbon의 로마제국쇠망사(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까지도 읽었다.


그러던 어느 날, Karl Marx의 Capital이 국부론을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쓴 책이라 국부론보다는 자본론을 중심으로 독서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독학으로 공부를 해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이 또한 공부의 과정이다.) 곧바로 자본론을 펭귄출판사(Penguin Edition) 영역본으로 구입해서 읽기 시작했다.


맑스경제학의 대가이자 세계적인 지리학자인 데이비드 하비가 강의한 마르크스의 ‘자본’을 21세기의 현대적 시각으로 풀어쓴 역작인 David Harvey의 A Companion to Marx’s Capital을 주석서로 삼아 Capital I•II•III을 차례대로 읽어 나갔다.


A Companion to Marx’s Capital은 마르크스 경제학의 대가이자 세계적인 지리학자인 David Harvey가 강의한 마르크스의 ‘자본’을 21세기 현대적 시각으로 풀어쓴 역작이다.

자본주의의 새로운 변형인 Neo-Liberalism(신자유주의)의 폐해로 인해 수많은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는 현대 시대에 자본이란 무엇인지 특유의 통찰력으로 밝혀내며 시대정신(Zeitgeist)을 갖추게 만든 책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즉 『자본의 생산•유통•자본의 총생산과정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자본의 운동법칙을 밝혀낸 책』에서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던 금융론과 지대론 그리고 공황론을 현대적 시각과 해석으로 그 내용을 보충한 명저인 David Harvey의 또 다른 역작인 The Limits to Capital을 읽고서야 비로소 자본론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참고로, ​이 저작들은 자본주의의 새로운 변형인 Neo-Liberalism(신자유주의)의 폐해로 인해 수많은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는 현대 시대에 자본이란 무엇인지 특유의 통찰력으로 밝혀내며 시대정신을 갖추게 만들었다.


아무튼, 이들을 읽고 나서 내가 그린 큰 그림은 아래와 같다.

자본론을 쓴 목적은,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자들(고전학파)이 옹호한 자유시장과 완전경쟁에 기반한 자본주의 제도의 이상향(Utopia)을 해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담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르도 등의 고전학파가 주장한 것처럼, 자유시장 경제체제가 모든 대상을 경제적으로 이롭게 만드는 제도가 아닌,

다수의 대중에게는 빈곤을, 극소수의 자본가들에게는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는 반이상향(dystopia) 임을 밝히려 저술한 것으로 이해하고 읽어가니 그제야 독서의 큰 틀이 잡혔다.


자본론을 어느 정도 읽고 나서는 또 사람이 정치•경제적으로 너무 편향되면 안 된다는 생각에 John Rawls의 A Theory of Justice를 사서 읽었다.


세 가지 책을 보수(국부론)-진보(자본론)-중도(정의론)로 내 나름대로 설정에서 하나씩 읽어 나갔다.

여러 차례 책을 반복해서 읽어 나가다가 어느 정도 방향을 잡고 나서 자본론을 바탕으로 하여 나머지 두 책을 참고서로 하는 방식으로 공부를 해오고 있다. 지금은 자본론을 더욱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David Harvey의 A Companion to Marx’s Grundrisse를 정독하는 중이다.


(자본론은 민법과 함께 평생을 두고 수십 번을 읽어 볼 계획이라 섣불리 무슨 내용이라 언급하지 않을 생각이다. 읽을 때마다 내용이 새롭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보니 제도권의 학위를 취득하는 대신에 혼자 독서를 통하여 내면을 채우기로 한 결정이 너무도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전자를 택했다면 또 나름 그곳에 필요한 조건을 충족하느라 넓고 깊이 있는 독서를 못했을 것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내가 스스로 결정한 일이었고 또 학위 취득을 포기함으로써 생기는 결점을 메꾸기 위해 여러 조치도 마련해 놓았으니 여한이 없다.


무엇보다도 나는 지금 평생에 걸쳐서 할 일, 즉 ‘서재에 쌓인 고전 읽기’이 있어서 너무 좋다. 집을 나서고 들어 올 때마다 이 책들을 종교의 경전을 대하듯 마주하니 수도자의 마음을 조금은 알 듯하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중년의 꿈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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