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孟子)가 말하는 ‘호연지기(浩然之氣)’란,
오랜 공부 끝에 문리를 터득하고 산마루에 올라 탁 트인 먼바다를 바라보며 ‘온갖 것들의 바탈’을 꿰뚫는 맑고 밝은 큰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마치 Karl Marx의 자본의 물신성(fetishism), David Hume의 공감(empathy), Adam Smith의 동감(sympathy)과 공평한 관찰자(impartial spectator), John Rawls의 공정으로서의 정의(justice as fairness)의 뜻을 깨닫는 때와 비슷하지 않을까?
이때서야 비로소 인간이 상호 무관심한 합리성(Mutually Disinterested Rationality)의 상태가 되어 이타심(altruism)이 생길 듯한데…
부르주아경제학(bourgeois economics)의 대부격인 Adam Smith의 도덕 감정론과 국부론은 Karl Marx의 자본론과 John Rawls의 정의론에서 주장한 공통된 가르침을 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문주의를 바탕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이기심(self-interest)을 적절히 조절하여 이타심(altruism)을 발휘토록 하여 인류 공동체의 발전에 기여하라는 것이다.
공자의 인, 석가의 자비희사, 예수의 사랑 모두 이타심을 가르치는 가치가 아니었던가!
내가 공부하던 것이 모두 한 가지 소리라는 것을 깨닫는 그러할 날이 오기는 하는 것일까?
안 오면 또 어떠냐!
가다가 멈추면 간만큼 얻는 것이 있겠지. 내가 해야 할 일은 오직 그 길을 향해가는 공부의 여정을 글로 써서 남기면 될 뿐!
어느새 브런치에 올린 글의 개수가 150개를 넘어섰다. 브런치의 작가지원 프로젝트에 따르면, 매거진마다 30개가 넘는 글을 올리면 전자책(POD) 발행을 신청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을 감안하면 아무리 못해도 책 4권은 거뜬히 낼 수가 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을 생각이다. 또 그렇게 할 까닭도 없다.
POD의 발행이 기념비적인 자기만족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에 그렇고 그런 책들이 가뜩이나 어지럽게 널려 있는데 나까지 하나 더 보탤 것 까지야! 많은 사람들이 찾을 책도 아니고 또 실제로도 그렇다. 틀림없이 그런 책이 될 것이다. 그러나, 글을 정말 잘 써 보겠다는 첫 마음을 잃지 않아야겠다. 다시 한번 전자책의 기능에 감사할 따름이다.
처음에 계획한 대로 브런치를 계속 글쓰기 연습공간으로 써야겠다.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이토록 자유롭고 진지하게 펼칠 공간이 어디 있을까! 또 진지하게 내 글을 읽어 주는 이들도 늘어가고…
가끔 브런치에는 자기가 올린 글이 조회수가 폭발했다고 자랑하는 이들이 많다. 부러운 마음에 어떤 글인지 가서 보지만 앞부분만 읽다가 만다. 글의 소재도 내용도 모두 내 마음을 끌지 못한다. 사실 나는 누구 보다 더 한쪽으로 치우쳐 도량이 좁은 독서를 하기는 한다.
요즘 뜨는 브런치북 코너나 브런치스토리 인기 글이나 에디터픽 최신 글 또는 맞춤형 추천 글의 제목을 쭉 훑어본다. 만약, 조선시대 과거를 보는 곳이나 요새판 글짓기 대회에 나갔는데 저런 시제가 나오면, 나는 글을 안 쓰고 바로 답안지를 내고 자리를 뜰 판이다. 아는 것도 없거니와 쓸 생각도 없다. 시제가 이혼, 우울, 퇴사, 소비…
내가 쓰는 글의 주제는 모두 독서와 공부다. 지금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것들을 가지고 할 말이 이토록 많았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 놀란다. 앞으로도 꾸준히 남들이 잘 읽지 않는 책을 소개하거나 남들이 내놓지 않는 나만의 생각 따위를 꺼내 볼 생각이다.
스승이 없이 또는 학교에 다니지 않고 혼자 공부하다 보니 자칫 잘못하면 독단 또는 독선으로 흐를 수 있어 보였다. 이러한 단점을 없애 보려고 학문의 깨달음은 토론을 통해서 하라는 것을 사정이 여의치 않아 글쓰기로 갈음했다. 물론, 독자들의 댓글도 거의 없고 조회 수 또는 라이킷 수도 적지만 글을 올리는 과정만큼은 매우 신중하게 한다. 왜냐면, 어쩌다가 제대로 아는 독자가 봤을 때 비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내가 공부를 하는 목적은 변화무쌍한 세상에 맞서 독립적인 주체인의 노릇에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여 나의 삶에 알맞도록 이를 가공하고 스스로 판단하여 잘 살아가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스스로 생각하여 만든 틀로 말과 글과 몸짓을 하는 독립적 주체인 “참된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공부법은 바로 독학이다. 독학은 자신이 선택한 주제로 자신에게 맞는 속도와 방법대로 공부를 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서로 견주며 이기거나 앞서려고 겨룰 일도 없고 내가 이끌어 가야 한다. 이 길에서 나와 주변을 제대로 파악하는 힘이 길러지게 된다. 또 내가 글을 써봄으로써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명확한 분별이 생긴다. 그리고 모자란 것은 앞으로 많이 배워야 할 것도 보인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아닌 오롯이 나를 위한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자세를 글쓰기를 그만둘 때까지 갖추려 한다.
그래서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통하여 치양지(致良知)를 실현한 자는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생기기 때문에 자존감이 높아진다!”를 증명하고 싶다.
여하튼, 지금은 그냥 나의 글쓰기 솜씨를 갈고닦을 때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