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해미읍성 회화나무 (충청남도 기념물 제172호)
충남 서산시 해미면에 있는 해미읍성 내에 있는 수령 약 300년의 회화나무로 1866년 병인박해와 관련이 있는 나무다. 호야나무라고도 불리며 높이 18m, 가슴 높이 둘레 4.5m 크기다.
이 나무 뒤에는 당시 천주교 신자를 가두는 감옥이 있었는데 1790년~1880년 사이 이곳 감옥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이 나무의 동쪽으로 뻗어있던 가지에 매달아 고문했다고 한다.
이후, 동쪽 가지는 훼손되어 옹이만 남았고, 가운데 것은 폭풍에 부러져 현재의 모습으로 남았다. 회화나무 뒤로 옥사가 복원되어 천주교 박해의 현장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이 세상을 주자학의 관점으로만 보았기 때문에, 양명학,불교학,천주학,동학을 모두 이단으로 간주하고 이를 배척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난 세기에는 현대 자본주의 제도를 택한 대부분 국가에서는 부르주아 경제학의 관점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이단시 하였다.
후자의 대표 교과서는 바로 ‘자본론’이다. 이 책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메커니즘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바탕으로 한 노동자 아니 피지배계층을 위한 삶의 지침서이자 실천 교재인 대다수 민중들의 성경이라고 본다.
하지만, 무지한 백성들이 이책을 경전으로 여겨야 할 당연한 주체인데도, 기득권의 농락과 세뇌에 의해 이를 이단의 대표적 금서로 분류하지 않았던가!
현상과 본질이 전도되어 왜곡된 현실로 나타난 원인이 바로 자본론의 핵심 범주인 물신성(fetishism)이다. 한마디로, 주체가 객체가 되어 대상을 객체의 시각으로만 보는 얼빠진 현상으로 이해한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보자면 주인도 아닌 노예가 마치 주인처럼 행세하는 꼴이다. 20세기초 우리나라의 소작농제도에서 ‘마름’과 21세기 신자유주의 제도(소유와 경영의 분리)하의 대표이사 와 같은 월급 수령자들이 그렇다.
그래서 Karl Marx가 상품•화폐•자본의 물신성을 깨뜨려 사물의 현상 대신 본질을 정확히 보라고 가르친 것으로 여긴다.
부르주아 경제학의 대부격인 Adam Smith의 도덕 감정론과 국부론은 Karl Marx의 자본론과 John Rawls의 정의론에서 주장한 공통된 가르침을 준다.
그것은 다름아닌 인문주의를 바탕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이기심을 적절히 조절하여 이타심을 발휘토록 하여 인류 공동체의 발전에 기여하라는 것이다.
공자의 인, 석가의 자비희사, 예수의 사랑 모두 이타심을 가르치는 가치가 아니었던가!
Karl Marx, Adam Smith 그리고 John Rawls의 저작을 깊게 파고들면 자본주의(Capitalism) 또는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라는 하나의 뿌리로 통한다. 처음에는 세 분야를 모두 따로 공부하다가 David Harvey가 Karl Marx의 Capital I•II•III를 21세기의 현대적 시각으로 풀어쓴 역작인 A Companion to Marx’s Capital과 The Limits to Capital을 읽으면서 이들이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떤 공부든 깊게 들아가면 결국은 그 소리가 그 소리인가 보구나. 물론, 좁고 얉은 내 생각일 뿐이다!
사실이 이러할진대, 무엇이 정통이고 또 이단이냐!
세상은 고정된 것(a thing)이 아니라 늘 변한다(a process).
관점에 따라 정통이 이단되고, 이단이 정통된다. 인싸가 아싸되고, 아싸가 인싸된다.
기회가 닿는다면, Karl Marx의 ‘Capital I•II•III’을 Adam Smith의 'The Wealth of Nations'과 John Rawls의 'A Theory of Justice'을 함께 꼭 읽어 보았으면 좋겠다.
세상이 다르게 보일 것이다.
아니다!
세상을 다르게 볼 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