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 답변서는 제가 쓴 겁니다.

by 들풀생각


이 글은 지적 수준의 잣대는 논리적 글쓰기라는 주제로 제가 겪은 일을 섞고 엮어 만든 이야기입니다.

참고로 저는 변호사의 법률문서나 민원인의 분쟁조정 신청서 그리고 직원의 경위서 따위를 보고 그들의 지적 수준, 성향, 직업 그리고 합리적 수용태도들을 분석하여 분쟁해결에 활용합니다.

내나 남이나 모두 서로의 글솜씨로 지적 수준을 가늠하는 것 같습니다.

신언서판(身言書判)!

인물의 됨됨이를 볼 때 표준으로 삼던 조건인 신수, 말씨, 문필, 판단력의 네 가지 가운데 문필력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새삼스럽게 느껴봅니다.




금융분쟁조정업무를 맡은 지 2년 차 때 일이다.


금융분쟁조정업무의 절차는 이렇다. 회사 또는 금융감독원에 분쟁조정이 접수되면 당사자 면담을 비롯한 사실관계를 조사한다. 그다음에 「금융위원회의 설치 등에 관한 법률」을 비롯한 관련법령 등을 근거로 민원인의 주장을 인용 또는 기각(각하) 할지를 결정한다. 기각으로 결정할 때는 반드시 처분 근거와 이유 제시를 서면으로 답변한다. 이때는 전화 또는 직접 만나 그 내용을 설명해야 한다.


실체와 절차를 잘 섞어 요령껏 해야 한다.


접수된 분쟁이 기각(불수용)으로 처리되는 경우 민원인들을 대개 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담당자와 면담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너무나 명확하여 전화로 설명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예외는 없었다.


민원의 내용부터 살펴본다.

1. 신용거래계좌에 담보가 부족하여 회사가 규정에 따라 반대매매를 실행하였다. 이 때문에 고객의 계좌에 손해가 발생하였다.

2. 회사의 조치를 부당한 행위라고 주장하며 관련 내용을 인터넷 등에 게시하여 불특정 한 다수인에게 알리겠다고 한다.

3. 이러한 행위가 명예훼손의 죄에 해당하는 지를 질의한 사항이다.


회사의 답변 핵심은 이렇다.

금융회사가 관련법령에 따라 적법한 절차대로 이행한 금융거래 행위를 인터넷 사이트에 게시하거나 언론 제보 등을 하여 회사의 평판에 손실이 생기는 경우, 명예훼손의 죄에 해당될 수도 있다고 답변한다.


처분 근거와 이유 제시는 아래와 같이 했다.

명예에 관한 죄는 공연히 사실을 적시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사람을 모욕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합니다. 명예의 주체는 사람이나 법인 기타의 단체입니다.

명예훼손죄의 객관적 구성 요건은 1) 공연성 2) 사실의 적시 3) 기수시기이며, 주관적 성립요건은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데 적합한 사실을 적시한다는 고의가 있으면 가능합니다.

※ 근거 법령: 형법 제307조 제1항, 제2항,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44조 제1항, 제2항 제70조 제1항

이하 생략…




고객이 직접 면담을 요청하여 서로 만났다.


정중히 인사를 하고 처리결과에 대하여 설명을 드려야 했다. 내가 직접 작성한 답변서라서 어려움 없이 그 내용을 거의 그대로 민원인에게 설명하였다.


민원인이 내용을 중간쯤 듣더니 갑자기 나보고 그런다. 다른 사람이 쓴 답변서를 로봇이나 앵무새처럼 되뇔 거라면 그가 직접 오던지 아니면 굳이 애먼 시간만 낭비한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내 겉모습이 머리에 수건을 찍 동여매고 지게나 지고 나무를 하며 장작이나 팰 사람으로 보였나 보다.)

똑바로 밝히면, 브런치나 블로그에 글을 쓴다고 알릴 때까지 가까이 있는 많은 사람들은 내가 글을 쓰기는커녕 한 해에 책 한 권도 안 읽는 그런 사람으로 본 듯했다. (얼마 전에 술자리에서 친한 입사동기한테 들은 얘기다.)

업무와 관련한 것 빼고는 회사에서는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주로 관심 있게 보는 정치•경제학과 역사와 철학(사상)을 주제로 하는 대화는 그들 대개가 골치 아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YouTube나 Bestseller Book, Golf, 예능프로그램을 즐겨보지 않는다. 한두 번 얘기를 해 봤지만 모두 제도권의 교육을 충실히 받은 모범생들이라 번거롭게 설명하지 않고서는 대화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가급적 입을 꾹 다문다. 그러나, 귀는 반드시 열어 둔다.


나는 다시 이 답변서는 관련 법령을 근거로 직접 쓴 것이고 그래서 지금 설명 중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한번 내 얼굴을 본 고객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이어서 그는 더 이상 나와 대화를 할 수 없으니 이 답변서를 쓴 사람과 서로 만나서 이야기한다며 휙 하고 돌아가버렸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 회사로 그분이 또 민원을 접수하였다.


주요 내용은, 회사의 처리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으며 지난번 면담을 온 민원 담당자가 진짜로 이 답변서를 직접 작성한 것인지에 대한 확인 요구를 한 것이다.


이 업무를 하다 보면 이 사건처럼 고객에게 불리한 답변이 가면 늘 이와 비슷한 모양으로 생트집을 잡는다. 그래서 나는 나를 대상으로 설정하고 또 답변서를 작성한다. (당시, 이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나 혼자여서 북 치고 장구치고 나팔도 불 수 있었다.)


’사실 관계를 확인해 본 결과, 그는 금융분쟁조정 전문가인 국가공인행정사이며 답변서는 그가 작성한 것이 맞습니다.‘는 내용이다.


때로는 나의 사무적인 태도를 친절하지 못하다고 트집 잡아 또 민원을 넣는다. (사무적으로 응대하지 않으면 회사가 책임을 져야 하는 사례가 많다. 그래서 직원이든 고객이든 모두 사무실에서 사무를 볼 때 사무적으로 대한다. )


그럴 때는 또 이렇게 답변한다.

(자기의 생각이나 언행에 대하여 좋고 나쁘거나 옳고 그름을 스스로 따져 말할 때는 기분이 언짢기는 하다. 그래도 또 도를 닦는 마음으로 한다. 이럴 때는 법륜스님의 즉문적설이 참 좋다.)


기타, 민원 담당직원의 사무적인 태도 등에 관하여서는 해당 임원 및 부서장에게 전달하여 주의조치를 내렸습니다.’라고 답변한다.


또, 너무 철저하게 조사해서 민원인이 할 말을 없게 만든 사건은 두고두고 담당자를 괴롭힌다. 물론, 직원들한테도 좋은 소리를 들은 적이 거의 없다. 금융회사(직원)와 민원인(고객) 그리고 금융감독원의 가장자리에서 늘 중심을 잡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분쟁조정업무의 담당자에게 유학의 중용(中庸)이나 불교의 중도(中道)가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그래서 늘 법학 교과서와 서양철학책과 더불어 동양철학책도 끼고 산다.




여하튼, 이 사건으로 늘 듣던 소리라서 마음은 조금 다쳤지만 고객이 내가 쓴 답변서의 실력을 높이 평가해 주어서 너무 기분이 좋았다. 다시 한번, 지적 수준의 잣대는 논리적 글쓰기가 증명할 것으로 보이는 바, 이 능력을 기르기 위해 많은 글을 바르게 읽고 써야겠다.


이날 이후로 본격적으로 법률문서 작성 요령집을 봐가며 글을 쓰는 연습을 시작했다. 그리고 법률문서 작성에 관한 최고의 교재는 바로 법학자들이 쓴 법학 교과서라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지난 주말에 모처럼 이오덕 선생의 우리글 바로 쓰기라는 책을 또 읽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내가 가진 종교는, 곧 “학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