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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김준과 나의 자기 계발

by 들풀생각


MBC에서 2012년에 56부작으로 방영한 드라마 무신을 참 좋아했다.

노비 출신으로 고려 무신정권 최고 권력자가 되는 김준과 그를 둘러싼 무인들을 다룬 역사 서사 드라마다.

드라마의 주인공인 김준은 천한 신분임에도 앞날을 위해 늘 책을 끼고 사는 것이 가장 마음에 와닿았다.




어제보다 더 나은 나를 위해 스스로를 늘 되돌아보고 또 채찍질해가고 있다. 학창 시절엔 전공의 틀을 벗어나 보려고 애썼고 회사를 다니면서는 또 써먹지도 않는 전공을 되레 살리려고 발버둥 치고 있다.


청개구리 심보다.


어차피 영어를 배웠으니 어디서든 꼭 한 번 써먹어 보자는 다짐이다.




나도 한때는 골프도 치고 술도 많이 마셨다. 골프는 2007년에 법인영업본부로 발령 나면서 할 수 없이 배워야 했다. 한 5년을 쳤는데 남들과 라운딩을 가면 겨우 욕만 면할 정도다.


처음에는 썩 내키지 않았지만 회사가 돈을 모두 대주는 것이라 하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여기에서도 뭐 하나라도 얻어가야겠다는 마음으로 배웠다. 골프실력을 키우기에 참 좋은 환경이었다. 그러나, 별 진전이 없었다. 내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인지 따로 재미도 없었다. 그래서 2012년 12월 1일, 다른 부서로 발령 나면서 모두 그만두었다.


그렇게 되고 나서도 한 1~2년간은 친구들과 모임 때문에 필드로 몇 번 나갔다. 어쩌다 한번 나가게 되고 또 ‘내돈내산’하는 처지다 보니 자주 갈 수 없었다. 당연히 실력은 늘지 않았다. 회사 동료나 친구들과 함께 스크린 골프를 조금씩 치다가 나중에는 아예 끊었다.


골프를 끊은 까닭은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즐길 취미가 아닌 밥벌이용 운동으로 배워 재미를 붙이지 못한 탓이다.


법인 영업을 하려면 평소에 술도 자주 먹고 또 주말에 골프를 치며 법인의 자금담당자들과 관계를 돈독히 해야 한다. 라운딩이 있는 날은 새벽에 일어나 내가 사는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데 있는 본부장과 자금담당자들을 차로 태워 도심 가까이에 있는 골프장으로 모시고 간다. 그리고 체크인 서비스를 도와준다. 이어서 4시간가량 라운딩을 끝내고 점심을 먹는다. 점심을 먹고 나면 이래저래 다시 서울로 올라온다. 그리고 올 때와 거꾸로 다시 멤버들이 왔던 자리로 모신다. 이래저래 하다 보면 저녁이 넘어서 집으로 돌아간다. 토요일 하루가 다 가버린다.


다음 날은 또 어느 법인 자금 담당자의 경조사가 이어진다. 물론, 결혼식처럼 미리 알고 있는 것이라면 좋겠지만 장례식같이 갑자기 생기는 때는 또 저 멀리 지방까지 다녀와야 한다. 주말은 그렇다 치더라도 평일 역시 만만치 않다. 거래법인의 자금담당자와 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해 점심과 저녁을 늘 함께 해야 한다. 늘 밤늦게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가서 다음날 새벽에 또 회사로 간다. 그렇게 지내다 보면 자기의 삶자체가 없다.


내가 주로 만났던 이들은 국가 또는 공공기관, 각종 기금 공제회, 대기업, 은행, 보험회사 따위와 또 자산운용회사에 소속된 자금관리 또는 운용부서 사람들이다. 아시다시피 어느 회사의 자금 부서는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수재들의 모임터다 담당자의 대부분이 해외 유학파(MBA) 출신 아니면 국내 명문대 출신의 수재들로 갑 중의 갑인 슈퍼갑이다. 법인 영업을 하면서 그동안 살아온 나를 많이 뒤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그 세계를 알 때까지 내가 참 좁은 우물 안에서 살아왔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법인 영업을 시작하고 1년이 지난 어느 날 이렇게 살아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다. 늘 술과 골프와 그리고 남을 위한 삶이 모두 내한테는 맞지 않는 옷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회사와 근로계약을 체결한 근로자의 의무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냥 환경 탓만 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나 스스로를 새롭게 뜯어고치고 또 바꾸지 않으면 평생을 남들이 가진 삶만 부러워하고 또 그들의 손아귀에 휘둘리게 될 것만 같았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또 앞으로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직무의 전문성을 확보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러고 나서 스스로가 이끌어 가는 삶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이 전문성을 인생 1막에서 써먹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설령 그렇지 못하더라도 인생 2막에서는 큰 노릇을 할 거라 굳게 믿었다.


그리하여 이 부서로 오기 직전까지 해왔던 영자신문과 원서 읽기로 나를 다시 점차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오후 시간은 짬이 안 나서 철저히 아침시간을 활용해야 했다. 회사에서는 대놓고 Financial Times와 The Economist를 봤다. 다들 업무 지식 습득 또는 상담목적용이라 하면 아무 말도 못 했다. 영어실력이 모자란 그들이 이렇게 하는 나를 부러워하면서도 못마땅해하는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해도 내 아랫사람이 저런 걸 보고 있으면 꼴불견이다 싶었다.


마케팅을 위해 거래법인의 사무실을 방문할 때 생기는 모든 자투리 시간을 잘 쓰기로 했다. 특히, 전철 안을 많이 썼다. 그렇게 했더니 점점 실무와 이론을 함께 갖춘 당당한 영업맨이 되어 가는 듯했다. 그리고, 또 언젠가는 지원부서로 되돌아갈 것이라 여겼다. 전문성 없이 회사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비애다. 부르면 부르는 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직장생활의 장수비결이다.


그러다가 2012년 12월에 금융분쟁조정부서로 옮기게 되었다. 그때부터는 법학과 철학과 영어를 남들 보란 듯이 공부를 하게 되었다. 법학은 회사에서 나머지는 회사 밖에서 공부하기로 했다. 그리고 현장에서 뼈저리게 느낀 직무 전문성 확보에 박차를 가했다.


그렇게 살아온 지금, 내가 그려온 꿈들이 하나둘씩 뚜렷하게 그려진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가야 할 길인 직무 전문성의 확보는 멀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우공이산(愚公移山)과 우보천리(牛步千里)의 뜻을 되새기며 또 뚜벅뚜벅 나아간다.


이제 또다시 회사에서 다른 일을 하더라도 꿈을 찾아 나서는 나의 길은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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